
영적질병으로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은 반드시 자신을 우상으로 세웁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떠난 영혼이 만들어내는 가장 큰 우상이다 ( 아모스 6:1-14)
서론
풍요로운 시대일수록 영혼은 더 빈곤해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전 어느 시대보다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손안의 스마트폰 하나로 세상을 연결하고, 원하는 물건은 하루 만에 집 앞까지 배달됩니다. 과거 왕들이 누렸던 풍요를 오늘날 평범한 사람들도 누릴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현대인은 가장 불안하고, 가장 외로우며, 가장 허무한 시대를 살아갑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은 그 이유를 매우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사람은 반드시 다른 무엇인가를 붙잡게 됩니다.
돈을 붙잡기도 하고, 성공을 붙잡기도 하며, 자신의 능력과 명예를 붙잡기도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우상숭배입니다.
아모스 시대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되어 있었고, 경제적으로 가장 번영하던 시대였습니다. 여로보암 2세 시대는 국토가 확장되고 무역이 활발해졌으며 귀족들은 전에 없던 풍요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번영을 축복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풍요 속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렸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아모스 6장은 단순히 부자들을 꾸짖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 문명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시대와 너무도 닮아 있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를 보여주십니다.
첫째, 교만의 본질이 무엇인지.
둘째, 교만이 사람의 삶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셋째, 하나님께서 왜 십자가를 통해 교만을 깨뜨리시는지를 보여주십니다.
Ⅰ. 교만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죄입니다 (아모스 6:1-3)
"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안일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여."
본문은 "화 있을진저"라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성경에서 "화 있을진저"는 단순한 꾸중이 아닙니다.
이미 심판이 결정되었음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언약적 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에게 같은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심판하시는 것입니까? "안일함"입니다.
여기서 안일함은 단순히 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하나님 없이도 안전하다고 믿는 상태입니다.
또한 "마음이 든든하다"는 표현 역시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자신의 힘과 환경을 신뢰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견고한 성읍을 의지했습니다. 경제력을 의지했습니다. 군사력을 의지했습니다. 자신들의 번영을 의지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교만을 성격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교만을 존재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교만은 내가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은 하와에게 이렇게 유혹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
이 한마디가 인류 최초의 죄였습니다.
결국 교만이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같은 죄를 반복합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말씀 없이도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경험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내 재산이면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내 건강이면 오래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언 16:18)
왜 하나님께서는 교만을 가장 싫어하실까요?
교만은 하나님의 자리를 인간이 차지하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죄는 결국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살인은 분노에서 시작되지만 그 분노의 뿌리는 자기중심성입니다.
탐욕 역시 자기중심성에서 시작됩니다. 음란도 자기 욕망을 하나님보다 앞세우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죄의 뿌리는 교만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교만을 "모든 죄의 어머니"라고 불렀고, 종교개혁자 존 칼빈 역시 "인간의 모든 우상은 교만에서 태어난다"고 말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기도가 줄어듭니다. 회개가 사라집니다. 은혜가 감격스럽지 않습니다. 십자가도 점점 멀어집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오늘 하루도 살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의 교만은 거친 말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교만은 우리의 영혼 깊숙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모스는 바로 그 영적 질병을 진단하고 있습니다.
Ⅱ. 교만은 사람보다 자신을 사랑하게 만든다 (아모스 6:4-6)
1. "요셉의 환난을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잡아 먹고...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도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암 6:4-6)
이 부분은 아모스서 전체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사치를 책망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상아 침대. 어린 양. 송아지. 포도주. 향유. 그러나 자세히 보면 하나님께서 정죄하시는 것은 물질 자체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의 마음의 방향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기 만족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이것이 죄였습니다.
2. 하나님의 축복은 언제 죄가 되는가?
성경은 부 자체를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도 부자였습니다. 욥도 부자였습니다. 다윗도 부자였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도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청지기였습니다. 반면 아모스 시대의 귀족들은 축복을 소비의 대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축복이 사명이 아니라 자기 만족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지 않는 순간, 축복은 우상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마태복음 6:24)
재물이 문제가 아닙니다. 재물이 주인이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버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문제는 돈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직업이 문제가 아닙니다. 직업이 하나님보다 앞서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공이 문제가 아닙니다. 성공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을 잃어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모스는 바로 그 영적 질병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3. "요셉의 환난을 근심하지 아니하였다"
'요셉'은 개인 요셉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북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는 언약 백성을 가리킵니다.
나라가 병들고 있습니다. 정의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이 울부짖고 있습니다.
약자들이 짓밟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귀족들은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오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더 편하게 살까?"
그들의 눈에는 사람보다 자기 자신이 더 크게 보였습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교만은 항상 시선을 하나님에게서 자기 자신으로 돌립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만 바라보게 만듭니다.
4. 왜 하나님은 이것을 가장 무겁게 심판하시는가?
언약 백성은 혼자 존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공동체입니다. 한 몸입니다. 한 지체가 아프면 모든 지체가 함께 아파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환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공동체의 아픔이 자신의 아픔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같은 진리를 말합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고린도전서 12:26)
이것이 언약 공동체입니다. 반대로 교만은 공동체를 개인주의로 바꾸어 버립니다.
오늘날 현대 사회의 가장 큰 문제 역시 이것입니다.
"내 가족만 행복하면 된다." "내 자녀만 잘되면 된다." "내 사업만 성공하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세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함께 울고 함께 기뻐하는 공동체입니다.
5.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이 보여 준 복음
예수님께서는 율법교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길가에 쓰러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사장도 지나갔습니다. 레위인도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멈추었습니다. 그 차이는 무엇입니까?
같은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마음으로 보았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내 일정'을 보았습니다. 사마리아인은 '한 영혼'을 보았습니다.
교만은 사람을 지나치게 합니다. 사랑은 사람 앞에 멈추게 합니다.
오늘 아모스가 말하는 '요셉의 환난'도 같은 원리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백성의 눈물을 지나쳤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도 그들을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6. 예수님은 우리의 환난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모스 시대의 지도자들은 백성의 고통을 외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절망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눈물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친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고난을 짊어지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이사야 53:4)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가 만나는 자리인 동시에 하나님의 긍휼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자리입니다.
교만은 남의 고통을 외면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남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짊어집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7. 우리의 삶에 적용해 봅시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나는 요셉의 환난을 보고 있는가?
가정 안에서 울고 있는 사람을 보고 있는가?
교회 안에서 지쳐 있는 성도를 보고 있는가?
직장과 사회 속에서 소외된 이웃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나의 성공과 나의 행복, 나의 소비만을 바라보고 있는가?
교만은 사람을 잃게 만듭니다. 그러나 복음은 사람을 다시 보게 만듭니다.
십자가를 깊이 묵상할수록 우리는 더 이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숙한 신앙은 화려한 성공이 아니라, 이웃의 아픔 앞에서 함께 울 줄 아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회복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가게 됩니다.
Ⅲ. 교만은 결국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을 우상으로 섬기게 만든다 (아모스 6:7-14)
1. "우리는 우리 힘으로..."
아모스는 이제 교만의 마지막 결말을 보여 줍니다.
사람을 잃어버린 인생은 결국 하나님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은 반드시 다른 신을 만들게 됩니다.
그 신은 돌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입니다.
아모스 6장 1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허무한 것을 기뻐하며 이르기를 우리가 우리 힘으로 뿔을 취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는도다."
이 한 구절이 아모스 6장의 결론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나라를 회복했습니다.
국경이 넓어진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경제가 살아난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평화를 누린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해냈다." "우리 힘이다." "우리 능력이다." 이것이 교만의 완성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성공이 계속되자 감사는 사라졌습니다.
예배는 형식이 되었습니다. 기도는 줄어들었습니다. 말씀보다 자신의 경험을 더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삶의 중심에서 밀려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2. 교만은 반드시 우상을 만들어 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반드시 다른 것을 예배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인간의 타락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의 형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롬 1:21-23)
우상숭배는 먼저 감사가 사라지는 데서 시작됩니다. 감사가 사라지면 은혜를 잊습니다.
은혜를 잊으면 모든 것이 내 노력처럼 보입니다. 그 순간 사람은 자신을 예배하기 시작합니다.
오늘날의 우상은 고대의 바알이나 아세라만이 아닙니다. 현대인은 훨씬 세련된 우상을 섬깁니다.
돈이 안전을 보장한다고 믿습니다. 학벌이 인생을 결정한다고 믿습니다.
경력이 미래를 책임진다고 믿습니다. 명예와 인기, 영향력이 삶의 가치를 증명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무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를 영원히 구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3. 바벨탑은 아모스 6장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창세기 11장에서 사람들은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그들이 외친 말은 무엇입니까?
"우리 이름을 내자."
놀랍게도 아모스 시대 사람들의 마음도 같았습니다.
"우리 힘으로." "우리 능력으로." "우리 성공으로." 창세기와 아모스의 시대는 수백 년의 차이가 있지만 죄의 본질은 같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하나님보다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벨탑을 흩으셨고, 아모스 시대의 북이스라엘도 앗수르를 통해 흩으셨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성공을 미워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세워진 성공을 심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공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그러나 하나님보다 성공을 더 사랑하는 순간, 성공은 우상이 됩니다.
4. 교만은 공의를 무너뜨립니다
아모스는 12절에서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너희는 정의를 쓸개로 바꾸며 공의의 열매를 쓴 쑥으로 바꾸었다."
여기서 정의와 공의는 단순한 사회 정의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정의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약자를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가난한 자의 억울함을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정의를 자기 욕심으로 바꾸었습니다.
힘 있는 자가 법을 만들었습니다. 부자가 가난한 자를 착취했습니다. 재판은 돈으로 움직였습니다.
이것이 교만의 사회적 결과입니다. 개인의 죄는 결국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정의를 회복하지 않는 나라를 심판하십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복음을 말하면서도 약자의 눈물을 외면한다면, 성공을 말하면서도 사랑을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아모스 시대의 경고를 다시 들어야 합니다.
5. 예수 그리스도는 두 번째 아담이 되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처럼 되려고 높아졌습니다. 바벨탑 사람들도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려 했습니다.
아모스 시대의 이스라엘도 "우리 힘으로"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6-8)
아담은 높아지려다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낮아지셔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인간은 "내가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종이 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 가장 약해 보이는 자리에서 가장 강하게 나타난 사건입니다.
세상은 힘으로 승리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세상은 자신을 높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비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만은 자신을 높이는 길입니다. 십자가는 자신을 비우는 길입니다.
6.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질문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나는 무엇을 자랑하며 살아가는가?
사람들이 나를 소개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
내 직업인가?
내 재산인가?
내 학벌인가?
내 성공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은혜"인가?
사도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갈라디아서 6:14)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은 사람을 사랑합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겸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결코 "우리 힘으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모스가 심판한 것은 부가 아닙니다.
성공도 아닙니다. 교만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밀어내고 자기 자신을 왕좌에 앉히는 죄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왕좌에서 우리를 내려오게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누구도 자신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오직 은혜만 자랑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십자가 앞에 우리의 교만을 내려놓읍시다.
"우리 힘으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왔습니다."라는 고백이 우리의 삶을 채울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남은 자(Remnant)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맺음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모스 6장은 단순히 오래전 북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부를 버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성공을 포기하라고 말씀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자리에 앉는 순간, 그것은 우상이 된다고 경고하십니다.
아모스 시대 사람들은 풍요를 누렸지만 하나님을 잃었습니다.
사치를 누렸지만 사랑을 잃었습니다. 안정을 누렸지만 영혼을 잃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화려한 문명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심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모스서 마지막 장인 9장에서는 놀라운 회복의 약속이 선포됩니다.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아모스 9:11)
심판의 목적은 멸망이 아니라 회복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버리시는 분이 아니라 죄에서 돌이키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 회복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교만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자신을 높인 죄를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람보다 자신을 더 사랑한 죄를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우리가 정의를 외면하고 사랑을 잃어버린 죄까지도 모두 십자가에서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는 누구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공로도, 우리의 능력도, 우리의 성공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의 자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갈라디아서 6:14)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묻고 계십니다.
"너는 무엇을 가장 의지하고 있는가?"
"너는 누구를 가장 사랑하고 있는가?"
"너는 요셉의 환난을 보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살펴봅시다.
혹시 성공이 하나님보다 앞서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재물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사람보다 자신의 안락함을 더 사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십자가 앞에 우리의 교만을 내려놓읍시다.
십자가는 교만한 사람을 정죄하는 곳이 아니라,
교만한 사람을 겸손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빚으시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실 때,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희소성을 좇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을 이 시대의 남은 자(Remnant)로 사용하셔서 무너진 가정과 교회와 민족을 다시 세워 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말하는 성공보다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십시오. 세상이 말하는 희소성보다 하나님의 거룩을 사모하십시오.
세상이 주는 박수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음성을 소망하십시오.
그 길이 생명의 길이며, 그 길이 참된 행복의 길이며, 그 길이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참여하는 길입니다.
영성 깊은 기도문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모스 선지자를 통하여 들려주신 주님의 음성 앞에 우리의 마음을 겸손히 엎드립니다.
주님,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며 알게 모르게 교만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에도 마치 우리의 능력으로 이루어 낸 것처럼 살아왔습니다.
기도보다 계획을 더 의지했고, 말씀보다 경험을 더 신뢰했으며,
성령님의 인도보다 우리의 판단을 앞세웠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
우리 안에 숨겨진 교만을 십자가 앞에서 철저히 깨뜨려 주옵소서.
사람들에게는 겸손한 척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내 뜻을 내려놓지 못했던 완고함을 회개합니다.
주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자기 의와 영적 교만을 성령의 불로 태워 주시고, 어린아이와 같은 겸손한 마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눈이 다시 사람을 향하게 하옵소서.
요셉의 환난을 보고도 외면했던 이스라엘처럼 살지 않게 하시고, 가정의 아픔을 품게 하시며,
교회의 눈물을 함께 흘리게 하시고, 가난하고 병들고 외로운 이웃을 향하여 예수님의 마음으로 다가가게 하옵소서.
우리가 누리는 모든 복이 우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기 위한 통로임을 결코 잊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의 예배가 형식이 되지 않게 하시고, 기도가 의무가 되지 않게 하시며, 말씀이 지식으로만 머물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의 인생이 "우리 힘으로 이루었습니다."라고 말하는 삶이 아니라,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성공할 때 더욱 겸손하게 하시고, 높아질수록 더 낮아지게 하시며,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이 나누게 하시고,
많이 배울수록 더욱 주님을 의지하게 하옵소서.
십자가의 은혜가 날마다 우리의 교만을 죽이게 하시고, 부활의 능력이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참된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이 시대가 물질을 자랑할 때 우리는 십자가를 자랑하게 하시고, 세상이 성공을 자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게 하시며,
세상이 자기 이름을 높일 때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높이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 가정을 남은 자의 가정으로 세워 주옵소서.
우리 교회를 남은 자의 공동체로 세워 주옵소서.
우리 민족 가운데 다시 말씀의 부흥과 거룩한 회개의 역사를 일으켜 주옵소서.
아모스 시대처럼 풍요 속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민족이 아니라,
풍요 속에서도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교만을 깨뜨리시고, 심령을 새롭게 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하신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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