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는 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는 누구에게나 '썰물의 시간'이 찾아옵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 같고, 열심히 살아도 열매가 보이지 않으며, 모든 것이 빠져나간 듯한 허무함이 밀려오는 때가 있습니다.
사업이 무너지고, 건강이 흔들리고, 가정이 어려워지고, 사역의 문이 닫히는 것 같은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묻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그러나 성경은 언제나 우리의 질문보다 더 깊은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 줍니다.
아모스 9장은 이런 허무한 시대를 향한 나침판을 보여줍니다. 아모스서는 대부분 심판을 선포하는 예언서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인 9장은 심판으로 시작하여 회복으로 끝납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의 흐름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는 타락으로 시작하지만 요한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끝납니다.
에덴동산을 잃어버렸지만 새 예루살렘을 얻게 됩니다. 십자가는 죽음으로 끝나는 것 같았지만 부활로 이어졌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언제나 심판보다 회복을 더 크게 준비하시는 분입니다.
1. 하나님은 왜 성전을 먼저 무너뜨리셨는가?
본문 1절은 매우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내가 보니 주께서 제단 곁에 서서 이르시되 기둥 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며..." (아모스 9장 1절)
하나님께서 성전을 심판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방 신전을 무너뜨리지 않으시고, 자신의 성전을 먼저 무너뜨리셨을까요?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보다 성전을 더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원래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이 되었습니다.
예배는 형식으로 남았고, 신앙은 습관이 되었으며, 제사는 계속 드려졌지만 하나님을 향한 마음은 사라졌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미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 절기를 내가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아모스 5:21)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화려한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성전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입니다. 예배당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지, 그 자체가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전을 허무심으로 이스라엘이 붙들고 있던 거짓 안전장치를 무너뜨리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이 주어집니다.
혹시 우리는 하나님보다 종교생활을 더 의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에 다니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봉사와 직분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대신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요한복음 4:23)
하나님은 예배 장소보다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2. 하나님의 깨뜨리심은 파괴가 아니라 새 창조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무너뜨리시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른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깨뜨리신 후에 더 크게 세우시는 분입니다.
창조 이전에는 혼돈이 있었습니다.
홍수 이후에는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벨탑이 무너진 후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포로가 된 후 남은 자를 통해 역사를 이어 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 이후 부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파괴를 즐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죄를 제거하시고,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옛사람을 깨뜨리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24)
씨앗은 썩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품는 것입니다.
포도는 으깨져야 포도주가 되고, 밀은 빻아져야 생명의 떡이 됩니다.
향유는 깨질 때 향기를 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도 몸이 찢기심으로 세상에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에서 찾아오는 '깨짐'은 하나님의 버리심이 아니라, 더 큰 은혜를 담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의 상처만 보지만, 하나님은 그 상처를 통해 이루실 영원한 열매를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허무시는 것은 심판의 마지막이 아니라, 회복의 시작입니다.
3. 하나님은 심판 가운데서도 반드시 '남은 자'를 남기신다
아모스 9장의 분위기는 8절에서 극적으로 바뀝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선언하시다가 갑자기 놀라운 약속을 하십니다.
"보라 주 여호와의 눈이 범죄한 나라를 주목하노라. 내가 그것을 지면에서 멸하리라. 그러나 야곱의 집은 온전히 멸하지는 아니하리라." (아모스 9:8)
여기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는 심판하시지만 언약은 버리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났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남은 자(Remnant)' 신학입니다.
'남은 자'는 숫자가 적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붙들려 있는 사람들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남은 자를 통해 역사를 이어 가셨습니다.
홍수 때에는 노아의 가족 여덟 명이 남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는 롯의 가정을 건져내셨습니다.
엘리야는 "나만 남았습니다."라고 탄식했지만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을 남겨 두셨습니다(열왕기상 19:18)
포로시대에는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와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통해 언약을 이어 가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남은 자의 계보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복음의 진리를 발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끝까지 붙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끝까지 우리를 붙드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0:28)
성도의 소망은 자신의 믿음의 크기에 있지 않습니다. 언약을 끝까지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실패한 것처럼 보여도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삶 가운데 '남은 은혜'를 남겨 두십니다.
남은 믿음이 있습니다.
남은 기도가 있습니다.
남은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남은 것을 통해 다시 시작하십니다.
4. 체질하시는 하나님, 버리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정결하게 하시는 하나님
아모스 9장 9절은 매우 아름다운 표현을 사용합니다.
"내가 명령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만국 중에서 체질하기를 체로 치듯 하려니와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체질한다'는 말은 농부가 곡식을 버리는 장면이 아닙니다. 알곡과 쭉정이를 구별하는 과정입니다.
체질의 목적은 파괴가 아니라 정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다루십니다.
때로는 질병이라는 체를 통과하게 하십니다. 실패라는 체를 지나게 하십니다.
관계의 아픔이라는 체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라는 체를 통과하게 하십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우리의 눈물 한 방울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
우리의 기도 하나도 헛되게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우리의 충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시편 56:8)
성도의 인생에는 우연이 없습니다.
모든 체질은 결국 하나님의 손 안에서 우리를 정금같이 빚어 가는 과정입니다.
5. 여호와 이레, 하나님은 미래에서 우리를 기다리신다
아모스의 시대는 북이스라엘이 멸망 직전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미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미래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신 사건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왜 원수의 나라 아시리아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약 30년 후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하고 많은 백성이 포로로 끌려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과의 만남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언제나 우리의 이해보다 앞서 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이십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할 때 마지막 순간 하나님께서는 숫양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그제야 아브라함은 외쳤습니다.
"여호와 이레." (창세기 22:14)
'여호와 이레'는 단순히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원어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미리 보시고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현재를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을 먼저 보십니다.
우리는 길이 막힌 것만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새로운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문이 닫힌 것만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문을 이미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미래에는 하나님이 먼저 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6. 반드시 밀물 때는 옵니다
유명한 강연가 데일 카네기는 평생 자신의 서재에 한 그림을 걸어 두었다고 합니다.
썰물로 인해 갯벌에 걸려 꼼짝하지 못하는 작은 배의 그림이었습니다.
그 그림의 제목은 단 하나였습니다. "반드시 밀물 때는 온다."
이 그림은 단순한 긍정의 상징이 아니었습니다. 절망은 영원하지 않다는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보다 더 깊은 소망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가장 큰 썰물은 십자가였습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도 침묵했습니다.
무덤의 돌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절망의 자리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밀물을 일으키셨습니다.
부활이었습니다. 십자가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습니다.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썰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그 침묵은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준비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언제나 가장 정확합니다.
전도서 3장 11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혹시 지금 여러분의 인생이 갯벌에 걸린 배처럼 보이십니까?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수고가 열매를 맺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아모스의 말씀을 붙드십시오.
하나님은 언약을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남은 자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이미 미래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되면 반드시 회복의 밀물이 찾아옵니다.
7. 하나님은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세우신다
아모스서는 심판으로 가득한 예언서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약속을 선언하십니다.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아모스 9:11)
이 말씀은 아모스서 전체의 절정이며, 구약 예언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성전을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세우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성전'이 아니라 '다윗의 장막'을 말씀하셨을까요? 이것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다윗의 장막은 무엇입니까?
다윗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긴 후 화려한 성전을 짓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순한 장막을 세우고 그 안에 언약궤를 모셨습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 앞에 찬양과 기도와 예배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중심으로 한 예배 공동체였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웅장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형식과 제도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장막은 건물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징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회복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건물이 아니라 예배의 본질, 곧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교제였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건물이 아닙니다. 프로그램도 아닙니다. 직분도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입니다.
성령께서 다스리시는 공동체가 진정한 교회입니다.
8. 다윗의 장막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다
아모스의 예언은 단지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메시아를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통해 하나님께서 무너진 언약을 회복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릴 때 이렇게 말합니다.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누가복음 1:32)
예수님은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으신 참된 왕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요한복음 2:19)
사람들은 건물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참 성전이 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찢기신 그 몸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이제 더 이상 특정한 장소에서만 하나님을 만나는 시대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무너진 장막이 회복된다는 말씀의 궁극적인 성취입니다.
9. 왜 사도행전은 아모스 9장을 인용하는가?
아모스 9장은 신약에서 매우 중요한 장입니다.
초대교회는 이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예언으로 이해했습니다.
사도행전 15장,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큰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방인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 많은 유대인들은 율법과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때 야고보는 결론을 내리며 바로 아모스 9장 11-12절을 인용합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다윗의 장막이 회복되면 그 은혜는 유대인에게만 머무르지 않고 모든 민족에게 흘러갈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컫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사도행전 15:17)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사를 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목적이 아닙니다. 열방의 구원이 목적입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이유는 우리만 복을 누리게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통해 또 다른 영혼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회복된 교회는 반드시 선교하는 교회가 됩니다.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반드시 은혜를 흘려보내는 사람이 됩니다.
10. 하나님께서 회복하시는 것은 우리의 인생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아모스는 마지막에 놀라운 장면을 보여 줍니다.
"보라 날이 이를지라... 파종하는 자가 곡식 베는 자의 뒤를 이으며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으며..."(아모스 9:13)
이 말씀은 단순히 농사가 잘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될 때 나타나는 풍성함을 상징합니다.
파종과 추수가 동시에 이어질 만큼 풍성한 은혜, 기쁨이 끊이지 않는 삶, 하나님의 임재가 넘치는 공동체를 말합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게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요한계시록 21:3)
놀랍게도 성경은 장막으로 시작하여 장막으로 끝납니다.
광야의 성막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임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었고, 마지막에는 새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아모스 9장의 회복은 단지 북이스라엘의 회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며,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될 영원한 소망입니다.
맺음말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지금 여러분의 인생이 무너진 성전처럼 보입니까?
기도가 메마르고, 삶이 흔들리며,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느껴집니까?
아모스 9장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무너진 것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무너진 자리에서 가장 위대한 회복을 시작하십니다.
성전을 허무셨지만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 성전을 세우셨습니다.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셔서 열방을 향한 구원의 문을 여셨습니다.
남은 자를 붙드시고, 언약을 끝까지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현재의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있습니다.
오늘의 썰물이 아무리 길어 보여도 하나님의 언약은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뒤에 부활이 있었듯이,
광야 뒤에 가나안이 있었듯이,
포로 생활 뒤에 귀환이 있었듯이,
우리의 눈물 뒤에도 반드시 하나님의 회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고백하십시오.
"반드시 밀물 때는 옵니다."
그 밀물은 세상의 행운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시간입니다.
그 밀물은 환경의 변화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의 삶 가운데 충만히 흘러넘치는 은혜의 역사입니다.
오늘도 그 약속을 붙들고 끝까지 믿음으로 걸어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회복과 소망이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1. 오늘 우리의 삶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모스 9장은 2,700여 년 전 북이스라엘을 향한 예언이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경제는 불안정하고, 미래는 예측하기 어렵고,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메말라 갑니다.
기술은 발전하지만 영혼은 공허해지고, 물질은 풍요로워졌지만 참된 평안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아모스 시대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겉으로는 풍요로웠지만 하나님을 잃어버렸던 시대, 종교는 있었지만 거룩함은 사라졌던 시대, 예배는 있었지만 회개는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러나 무너뜨리신 목적은 멸망이 아니라 회복이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의 무너진 자리에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혹시 지금 하나님께서 내 삶의 어떤 부분을 흔들고 계신다면, 그것은 버리심이 아니라 더 깊은 믿음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초청일 수 있습니다.
12. 하나님의 사람은 상황이 아니라 언약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믿음이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더 신뢰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녀가 없었지만 언약을 바라보았습니다.
요셉은 감옥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꿈을 붙들었습니다.
모세는 홍해 앞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의 크기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더 크게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면서도 그 너머의 영광을 바라보셨습니다.
성도는 현실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 약속을 붙드는 사람입니다.
환경은 끊임없이 변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상황 중심이 아니라 언약 중심이어야 합니다.
오늘의 썰물이 내 인생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의 마지막을 결정합니다.
13. 반드시 밀물은 옵니다
밀물은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저절로 찾아옵니다.
우리는 억지로 밀물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기다릴 수는 있습니다.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닙니다. 기다림은 하나님의 시간을 신뢰하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밤새 그물을 던졌던 베드로처럼, 아무것도 잡지 못한 것 같아도 예수님의 말씀에 다시 그물을 내릴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하인들이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웠을 때, 그 물은 하나님의 때에 가장 좋은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 되었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는 끝이었지만 하나님께는 시작이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시간은 우리의 계산보다 늦어 보일 수 있지만, 결코 늦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시계는 언제나 정확합니다.
14. 우리의 최종적인 밀물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아모스 9장의 마지막 회복은 단지 이스라엘의 농사가 잘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하는 예언입니다.
오늘 우리는 여전히 눈물 흘립니다. 여전히 병이 있습니다. 여전히 실패도 경험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마지막을 이렇게 약속합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요한계시록 21:4)
성도의 가장 큰 소망은 이 땅의 성공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날에는 더 이상 썰물이 없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은혜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고난을 영원한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로마서 8:18)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아모스 9장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첫째,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시지만 언약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무너진 것을 끝내시는 분이 아니라 다시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셋째, 하나님의 회복은 우리의 기대를 넘어 열방과 하나님 나라까지 이어지는 구속사의 완성입니다.
혹시 오늘 여러분의 삶이 썰물처럼 느껴진다면 낙심하지 마십시오.
십자가 이후에 부활이 있었고, 광야 이후에 가나안이 있었으며, 포로 생활 이후에 귀환이 있었고,
무너진 다윗의 장막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열렸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마지막 말씀을 회복으로 쓰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믿음으로 선포하십시오. "반드시 밀물 때는 옵니다!"
그러나 그 밀물은 단순한 환경의 변화가 아닙니다.
그 밀물은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시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삶 가운데 충만하게 역사하는 시간입니다.
그 밀물은 우리를 회복시키고, 우리의 가정을 회복시키며, 교회를 회복시키고,
마침내 열방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거룩한 은혜의 물결입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믿음을 지키십시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오늘의 썰물은 하나님의 마지막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지막은 언제나 회복입니다.
영성 깊은 기도문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아모스 선지자를 통하여 심판 가운데서도 회복을 약속하시고,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세우시겠다고 선언하신 주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눈에는 무너진 현실과 메마른 광야만 보일 때가 많지만, 주님은 그 자리에서도 새로운 생명을 준비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환경을 바라보지 않게 하시고, 변하지 않는 주님의 언약을 붙들게 하옵소서.
예배보다 형식을, 주님보다 세상을 사랑했던 우리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고, 성령 안에서 참된 예배자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 삶의 모든 깨짐이 헛되지 않게 하시고, 체질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속에서 더욱 순결한 믿음과 성숙한 인격을 이루게 하옵소서.
무너진 가정에는 회복을, 지친 성도에게는 새 힘을, 병든 몸에는 위로를, 낙심한 영혼에는 다시 일어설 소망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 교회가 다윗의 장막처럼 주님의 임재가 충만한 공동체가 되게 하시고, 복음이 땅끝까지 흘러가는 선교적 교회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무엇보다 우리 삶의 최종적인 소망이 이 땅의 성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있음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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