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칼럼] 복음 들여다보기

[영성 칼럼] 옆구리의 가시

knowledgeplatform100 2026. 7. 16. 09:58

남겨진 가나안! 뜻을 정하지 않는 자들의 옆구리의 가시

(사사기 2:1-5, 여호수아 24:14-24)

서론

사람은 누구나 가능성이 보이는 일에는 도전합니다. 그러나 불가능해 보이는 일 앞에서는 대부분 포기합니다.

세상은 "가능한 것을 계산하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불가능한 것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인간의 가능성이 끝난 자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백 세에 아들을 주셨고(창 21:1-3), 홍해를 가르셨으며(출 14:21-22), 

무너질 수 없는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셨고(수 6:20),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으며(요 11:43-44),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셨습니다(마 28:5-6).

 

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능성을 선포하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마태복음 19:26)

 

오늘 본문 역시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왜 하나님께 능력을 받은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다가 결국 실패했는가?

 

그리고 더 나아가 질문합니다.

왜 어떤 사람은 불가능을 두려워하지만, 어떤 사람은 불가능 앞에서 오히려 설레는가?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분명합니다.

불가능을 이루는 사람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1. 하나님은 이미 능력과 공급을 약속하셨다.

많은 성도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모든 문제가 자동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축복만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첫째는 능력(Power) 입니다. 

둘째는 공급(Provision)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누가복음 10:19)

 

능력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리고 공급 역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 7:7)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도 말합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야고보서 4:2)

 

기도는 하나님의 공급을 받아들이는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주시지 않습니다.

필요한 순간마다 기도를 통해 공급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결코 부족한 존재가 아닙니다.

 

능력도 있고, 공급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왜 우리는 자주 무력합니까?

왜 신앙생활이 반복되는 실패의 연속입니까? 사사기는 바로 그 질문에 답합니다.

2. 실패의 원인은 능력이 아니라 순종이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왔습니다. 광야는 끝났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왔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모든 전쟁이 끝났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사기 1장은 놀라운 말을 기록합니다.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사사기 1:28)

 

성경은 "쫓아내지 못하였다." 라고 하지 않습니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히브리어 원문 역시 의도적인 불순종을 의미합니다.

 

능력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세상과 타협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사기 2장에서 하나님의 책망은 이것입니다.

"너희는 이 땅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라."

 

왜 언약을 맺었습니까? 세상과 거래하는 것이 더 편했기 때문입니다. 

조금은 하나님을 믿고, 조금은 세상을 의지했습니다. 이것이 모든 영적 타락의 시작입니다.

존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어내는 공장이다."

 

가나안은 단순한 민족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가나안은 돈, 명예, 성공, 안락함, 자존심, 세상의 인정입니다.

하나님보다 그것을 조금 더 남겨두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너희 옆구리의 가시가 될 것이다." (사사기 2:3)

 

처음에는 작은 타협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남겨둔 죄는 반드시 올무가 됩니다.

죄는 절대로 중립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존 오웬은 『죄 죽임』에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죄를 죽이지 않으면 죄가 너를 죽인다." 이것이 사사기의 신학입니다.

3. 하나님은 90%의 순종이 아니라 100%의 순종을 원하신다.

많은 성도들이 여기에서 멈춥니다. 

예배도 드립니다. 기도도 합니다. 헌금도 합니다. 봉사도 합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는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리 잡습니다. 

사탄은 노골적인 죄보다 적당한 신앙을 더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적당한 순종은 사람을 안심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순종하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여호수아는 마지막 설교에서 말합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수아 24:15)

 

이것은 단순한 결심이 아닙니다. 생명을 건 언약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를 따르라』에서 말합니다.

"값싼 은혜는 제자가 되지 않아도 되는 은혜이다. 그러나 참된 은혜는 우리를 십자가 앞으로 부른다."

 

순종은 감정이 아닙니다. 결단입니다. 믿음은 느낌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어디까지 순종하겠느냐?"

 

사사기의 실패는 능력 부족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순종 부족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능력을 주셨고, 공급을 약속하셨으며, 승리를 예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불가능을 뛰어넘는 믿음 대신 가능한 만큼만 순종하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같은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왜 우리의 순종을 통해 불가능한 일을 향한 설렘을 회복시키려 하실까요?

4. 불가능한 일은 '뜻을 정하는 사람'에게 시작된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마지막 설교를 합니다. 그는 단순히 "하나님을 잘 믿으십시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수아 24:15)

 

이 말씀은 하나님을 떠나도 된다는 허락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호수아의 안타까운 절규입니다.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칠 것인가?" "언제까지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붙들 것인가?"

 

"오늘 결단하라." 여호수아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재능 있는 사람을 통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뜻을 정한 사람을 통해 시작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했습니다.

다니엘 1장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바벨론은 세계 최강의 나라였습니다. 한 청년이 거절한다고 세상이 달라질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한 사람의 결단을 사용하셨습니다.

 

결국 다니엘은 총리가 되었고, 페르시아와 메대 제국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불가능은 언제 시작됩니까? 뜻을 정하는 순간부터입니다.

갈렙도 뜻을 정했습니다.

열두 명의 정탐꾼 가운데 열 명은 현실을 보았습니다. 두 사람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민수기 14장 24절은 갈렙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는 다른 마음을 품었고 온전히 나를 따랐다."

 

여기서 "온전히"라는 말은 히브리어 '말레(מָלֵא)'입니다. '가득 채우다.' '끝까지 따르다.' '완전히 순종하다.' 라는 뜻입니다.

갈렙은 부분적으로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순종했습니다. 85세가 되었을 때도 그는 헤브론 산지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사람들은 은퇴를 생각하는 나이에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았습니다. 

왜입니까? 그는 사람의 계산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더 크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5. 하나님은 불가능을 통해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우리는 흔히 "가능한 일을 잘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백 세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삭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열매였습니다.

 

모세가 그랬습니다. 홍해는 군사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갈라졌습니다.

기드온도 그랬습니다. 3만 2천 명의 군대를 300명으로 줄이셨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라." (사사기 7:2)

 

하나님은 우리의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무대를 만드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스가랴 4:6)

6.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언제나 불가능을 요구하셨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앞에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고 하셨습니다.

물 위를 걸으시면서 베드로에게 "오라." 고 하셨습니다. 나사로 무덤 앞에서는 "돌을 옮겨 놓으라." 고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늘 불가능을 명령하십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믿음은 가능한 곳에서는 자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불가능과 하나님의 약속이 만나는 자리에서 자랍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사람들을 소개하면서 단 한 사람도 편안한 길을 걸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노아는 비 한 번 오지 않았던 시대에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모세는 홍해 앞에서 지팡이를 들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성을 향해 창을 든 것이 아니라 침묵하며 성을 돌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신뢰하는 것입니다.

7. 성령충만은 우리의 한계를 깨뜨리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성령충만은 단순히 감정이 뜨거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믿음의 그릇을 계속 확장시키시는 과정입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에베소서 5:18)

 

여기서 "받으라"는 헬라어는 현재 명령형입니다. 즉, 계속해서 충만함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왜 계속 충만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믿음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욕망이 너무 크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너무 작기 때문에 문제라고 하셨다."

 

우리는 작은 성공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문제 해결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동역자로 빚어 가십니다.

8. 불가능한 일에 대한 설렘은 하나님 나라를 보는 사람에게 생긴다.

사람들은 현실을 계산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가능성을 계산합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요한은 밧모섬에서 계시를 받았습니다. 

초대교회는 핍박 속에서도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왜입니까?

그들은 현실보다 하나님 나라를 더 선명하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묻고 계십니다. "너는 아직도 가능한 일만 꿈꾸고 있는가?"

아니면 "나와 함께 불가능한 일을 꿈꾸고 있는가?"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두려움은 사명이 되고, 한계는 믿음이 되며, 불가능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무대가 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가장 뛰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뜻을 정한 사람, 끝까지 순종하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가능성을 믿고 불가능 앞에서도 설렘을 잃지 않는 사람입니다.

 

9. 예수 그리스도는 '불가능한 일'의 완성이시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사기에서 이스라엘의 실패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을 주셨습니다. 공급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끝까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남겨 둔 가나안은 결국 올무가 되었고 가시가 되었으며 우상이 되었습니다(사사기 2:3).

 

그러나 성경은 사사기의 실패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사기의 실패는 오히려 한 사람을 기다리게 합니다.

끝까지 순종하는 참된 이스라엘. 새로운 여호수아. 새로운 사사.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말씀합니다.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로마서 5:19)

 

아담은 실패했습니다. 이스라엘도 실패했습니다. 사사들도 실패했습니다. 왕들도 실패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은 끝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은 말씀합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8)

 

사사기의 핵심은 "순종하지 못한 인간"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끝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소망은 우리의 결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에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Active Obedience)이라고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죄를 용서하기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루지 못한 완전한 순종을 대신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10. 성령은 우리를 '가능한 사람'이 아니라 '불가능을 믿는 사람'으로 변화시키신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 제자들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베드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십자가 앞에서는 여종 앞에서도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이후에는 수천 명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합니다.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능력이 아닙니다.

학벌도 아닙니다.

환경도 아닙니다.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사도행전 1:8)

 

여기서 '권능'은 헬라어 두나미스(δύναμις)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힘이 아닙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사람은 문제가 없어지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보다 하나님을 더 크게 보는 사람입니다.

환경이 좋아지는 사람이 아니라, 환경을 넘어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11. 하나님은 우리의 한계를 깨뜨리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성화(Sanctification)의 과정을 통해 우리의 한계를 깨뜨리십니다. 

처음에는 작은 은혜만 담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계속 순종하는 사람의 그릇을 넓혀 가십니다.

바울도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가 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고린도후서 3:18)

 

하나님은 작은 사람을 크게 사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을 통해 사람 자체를 새롭게 만드십니다.

성령은 능력을 더하는 분이 아니라,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분입니다.


12.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던지시는 질문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조용히 물으십니다. "너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혹시 90% 순종에 만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남겨 둔 가나안이 있지는 않습니까?

 

타협하고 있는 죄는 없습니까? "이 정도면 괜찮겠지." "이 정도 신앙이면 충분하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평범한 신앙으로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믿음으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태복음 17:20)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음의 크기가 아닙니다. 믿음의 대상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맺음말

사사기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불가능을 향해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반복되는 실패가 되었습니다. 

 

반면, 아브라함은 불가능을 믿었습니다. 모세는 불가능 앞에 지팡이를 들었습니다.

갈렙은 85세에도 산지를 구했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했습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위해 생명을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가장 불가능한 길을 걸으셔서 부활이라는 가장 위대한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가능한 일만 꿈꾸지 말아라." "나와 함께 불가능한 일을 꿈꾸어라." 불가능한 일을 향한 설렘은 무모한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이며, 성령께서 심어 주시는 거룩한 소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끝까지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 세상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일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이것이어야 합니다.

 

 기도문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현실의 벽 앞에서는 쉽게 낙심했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든다고 고백하면서도 눈에 보이는 환경을 더 크게 바라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완전히 몰아내지 않고 타협했던 것처럼,

우리도 마음속에 남겨 둔 죄와 세상에 대한 미련, 자기중심적인 욕심과 교만을 품고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우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작은 가나안들을 성령의 불로 태워 주시고, 우리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순종의

사람으로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무엇보다도 죽기까지 순종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고, 우리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복음의 사람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성령 하나님,

우리 안에 새로운 설렘을 일으켜 주옵소서.

세상이 말하는 성공에 설레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일에 가슴 뛰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안전한 길보다 믿음의 길을 선택하게 하시고, 익숙한 길보다 순종의 길을 걷게 하시며,

가능한 일만 계획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실 불가능한 일을 기대하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의 인생이 계산으로 움직이는 인생이 아니라 믿음으로 움직이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사람의 박수보다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게 하시고, 세상의 평가보다 주님의 칭찬을 사모하게 하시며,

눈앞의 유익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하옵소서.

 

우리를 위해 끝까지 순종하시고 죽음과 부활로 영원한 승리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