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원받음과 능력 받음은 따로따로인가? (사도행전 8장)
“성령을 받는 것과 성령으로 살아가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말씀은 사도행전 8장입니다.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하나의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구원받음과 능력 받음은 따로따로입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또 다른 차원의 성령세례가 필요합니까?
어떤 사람은 그렇다고 말합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받는 것과 성령의 능력을 받는 것은 별개의 사건이다.”
반면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성령을 단순히 구원 이후에 추가로 받는 능력의 근원으로 보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시며,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를 성화시키시고, 또한 복음의 증인으로 능력 있게 사용하십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 8장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본문에는 놀라운 장면이 나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빌립의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세례도 받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 사도행전 8:16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이 내려가 기도하고 안수하자 성령을 받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질문이 생깁니다.
“그러면 정말 구원과 성령은 두 단계입니까?”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을 피하지 않고 말씀 안에서 정직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교회를 움직이신다
사도행전 8장의 시작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스데반이 순교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납니다.
사도행전 8장 1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사람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완전한 실패입니다. 교회가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성도들이 흩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달랐습니다. 흩어짐이 선교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는 너무 좋았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서로 사랑했습니다. 말씀을 배웠습니다. 공동체가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예루살렘 안에만 가두어 두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핍박이라는 고통스러운 사건을 통해 교회를 흩으셨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흩어짐을 통하여 복음이 사마리아로 들어갑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를 움직이십니다.
내가 원했던 직장에서 나오게 될 수도 있습니다. 계획했던 일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깨질 수도 있습니다.
내가 의지했던 것이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묻습니다.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그러나 사도행전 8장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흩어짐이 끝이 아닐 수 있다.” “하나님은 흩어진 자리에서도 복음의 길을 여신다.”
복음은 마치 흩날리는 씨앗처럼 박해와 흩어짐을 통하여 오히려 더 넓은 곳으로 퍼져 나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을 너무 빨리 실패라고 이름 붙여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만 보면 실패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빛에서 보면 십자가는 실패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의 고난만 가지고 인생 전체를 해석하지 마십시오. 부활의 빛으로 오늘을 해석하십시오.
2. 빌립은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했다
사마리아는 유대인들이 좋아하지 않았던 곳입니다. 역사적으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깊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으로 빌립이 들어갑니다. 사도행전 8장 5절입니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전파하니.” 빌립의 중심은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빌립의 중심은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기 능력을 보여주려고 간 것이 아닙니다.
자기 이름을 높이려고 간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갔습니다.
그래서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말씀과 표적이 함께 나타났지만 중심은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7절과 8절입니다.
귀신들이 떠나가고, 병든 자들이 고침을 받고, 걷지 못하던 사람들이 일어나고, 그 성에 큰 기쁨이 임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단순히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현상이 아닙니다.
사람을 그리스도께 돌아오게 하는 역사입니다.
3. 성령의 가장 큰 능력은 기적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다
여기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쉽게 외적인 현상을 생각합니다.
방언, 예언, 치유, 기적, 놀라운 경험, 강력한 감정. 물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주권적으로 다양한 은사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가장 근본적인 사역은 무엇입니까? 사람을 새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요한복음 3:3
그리고 6절에서는 말씀하십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성령께서 하시는 가장 위대한 기적은 무엇입니까?
죽은 영혼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싫어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사랑하던 사람이 죄를 미워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살던 사람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재미없는 사람이 예배가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성공만 바라보던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가장 중요한 역사는 단순한 외적 기적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 곧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적을 사모하되 기적보다 하나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은사를 사모하되 은사를 주시는 성령님을 더 사모해야 합니다.
능력을 구하되 능력보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해야 합니다.
4. 그렇다면 왜 사마리아 사람들은 세례 후에 성령을 받았는가?
이제 가장 어려운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사도행전 8장 14절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리고 15절입니다.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16절입니다.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그리고 17절입니다.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은지라.”
이것만 읽으면 정말로 “구원받는 것과 성령받는 것은 별개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오순절주의 전통에서는 이 본문을 중요한 근거로 사용하여 구원 이후의 성령세례, 또는 제2의 축복을 강조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개혁주의는 어떻게 해석할까요?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구분이 필요합니다.
5. 성령의 내주와 성령의 충만을 구분해야 한다
성령의 사역은 하나가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인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성화시키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를 충만하게 하시고 증인으로 능력 있게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내 안에 계시는가?” 와 “나는 성령으로 충만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는 서로 완전히 동일한 질문이 아닙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말합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현재적인 충만입니다.
한 번 받은 성령을 다시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 내주하시는 성령께 계속해서 지배받으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성령충만은 반복됩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임하였지만, 4장에서도 제자들이 성령충만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은 구원받은 사람에게 계속해서 나타나는 현재적이고 반복적인 성령의 통치와 능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성령을 구원의 적용자이자 신자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고 내주하며 성화시키시는 분으로 설명합니다.
6. 그렇다면 사도행전 8장의 특별함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사도행전 8장을 모든 시대의 규칙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자체를 보면 성령을 받는 순서가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믿음과 성령의 역사가 함께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는 고넬료의 집에 성령이 먼저 임하고 세례가 뒤따릅니다. 19장에서는 세례와 성령의 사건이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8장의 순서를 가지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구원받은 후 별도의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 라고 일반화하는 것은 본문의 전체 증언과 맞지 않습니다.
F. F. Bruce 역시 사도행전 8장의 독특한 간격을 단순히 모든 그리스도인의 보편적 경험으로 일반화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마리아인들이 성령을 받은 사건을 그들이 하나님의 새 백성 안에 온전히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공적으로 확인하는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칼빈도 매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칼빈에 따르면 사마리아인들이 이미 믿음과 세례 가운데 성령의 구원적 사역을 경험하고 있었지만, 사도행전 8장의 성령 임재는
복음의 초창기에 나타난 특별한 성령의 은사와 교회의 확장을 확증하는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마리아 사건은 단순히 개인의 영적 체험을 설명하는 본문이 아니라 구속사적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라는 약속이 실제 역사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7. 성령께서 사마리아에 임하신 것은 교회의 하나됨을 보여준다
이것이 사도행전 8장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의미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에게 타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도 동일한 성령을 주셨습니다.
왜 베드로와 요한이 내려갔습니까? 단순히 “사마리아인들에게 성령을 나누어 주기 위해서”라고만 볼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사마리아 교회를 자기들과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F. F. Bruce도 이 사건을 사마리아인들이 더 이상 주변부의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 백성 안에 온전히 포함되었음을
교회의 권위 있는 증인들이 확인하는 사건으로 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너희는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복음은 민족의 벽을 무너뜨립니다.
복음은 지역의 벽을 무너뜨립니다.
복음은 계층의 벽을 무너뜨립니다.
복음은 문화의 벽을 무너뜨립니다.
성령께서는 교회를 하나 되게 하십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4장 4절에서 말합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그러므로 진정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곳에는 그리스도의 몸을 하나 되게 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8. 그런데 그곳에 시몬이 있었다
사도행전 8장이 더욱 두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마리아에는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었습니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마술사라고 말합니다. 그는 오랫동안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큰 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자신에게 집중시켰습니다.
그런데 빌립이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자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복음과 인간의 종교성을 구별해야 합니다.
복음은 나를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그리스도를 크게 만드는 것입니다.
시몬의 문제는 능력이 부족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의 문제는 주인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것처럼 보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을 보자 그것을 사고 싶어 했습니다.
19절입니다.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여러분, 성령은 상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거래 대상이 아닙니다.
은사는 우리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조종할 수 있는 힘이 아닙니다. 성령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엄중하게 말합니다.
“네 은과 함께 망할지어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그리고 22절에서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9. 시몬의 문제는 능력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여기에서 오늘 가장 중요한 영적 질문이 나옵니다.
“나는 성령의 능력을 원하는가, 아니면 성령의 하나님을 원하는가?”
이 질문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무엇을 원합니까?
문제가 해결되기를 원합니다. 사업이 잘되기를 원합니다. 병이 낫기를 원합니다. 자녀가 잘되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교회가 부흥하기를 원합니다. 좋습니다. 그것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더 깊은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원합니다.”
“하나님, 제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나님, 능력을 주시기 전에 저를 변화시켜 주십시오.”
“하나님, 저를 사용하시기 전에 저를 깨끗하게 하십시오.”
“하나님, 사람들이 저를 크게 보게 하지 말고 예수님을 크게 보게 하소서.” 이것이 성령의 사람입니다.
10. 성령충만의 증거는 ‘나의 크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크기’다
시몬은 자기가 큰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은 자기가 작아지고 그리스도가 커지는 것을 기뻐합니다.
세례 요한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 요한복음 3:30
이것이 성령충만의 핵심입니다. 성령충만하면 내가 유명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유명해집니다.
성령충만하면 사람들이 나를 칭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성령충만하면 내 은사가 커지는 것보다 내 사랑이 커집니다. 내 기도가 많아지는 것보다 내 순종이 깊어집니다.
내 말이 강해지는 것보다 내 삶이 거룩해집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의 성령의 열매를 보십시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것이 성령의 사람에게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11. 성령의 능력은 현장에서 나타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아주 실제적입니다.
순종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이 되리라.”
성령의 능력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능력을 받는 목적은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 계속 내 안에서 무언가를 찾기보다 현장으로 나가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빌립은 사마리아에 갔습니다.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이 우리의 사마리아입니다.
직장이 우리의 사마리아입니다.
학교가 우리의 사마리아입니다.
지역사회가 우리의 사마리아입니다. 내가 매일 만나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교지일 수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골방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하는 현장에서 나타납니다.
12. 교회 안과 교회 밖을 나누지 말라
오늘날 우리 신앙의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신앙과 일상을 분리하는 것입니다.
주일은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그러나 월요일은 내 것입니다. 예배 시간은 거룩합니다. 그러나 직장에서는 세상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교회에서는 성도입니다. 그러나 집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이것은 성경적 신앙이 아닙니다.
로마서 12장 1절은 말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의 삶 전체가 예배입니다.
직장에서 정직하게 일하는 것도 예배입니다.
가정에서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도 예배입니다.
자녀를 믿음으로 양육하는 것도 예배입니다.
사람을 용서하는 것도 예배입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진실을 선택하는 것도 예배입니다. 성령께서는 주일 오전에만 우리 안에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월요일 아침에도 계십니다.
직장에도 계십니다.
시장에도 계십니다.
가정에도 계십니다.
병실에도 계십니다.
고난 가운데도 계십니다.
13. 성령충만은 ‘한 번의 폭발’보다 ‘매일의 순종’이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강력한 성령체험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체험을 신앙의 기준으로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성령충만의 진짜 증거는 무엇입니까?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용서하기 싫을 때 용서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싫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성령의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합니다. 그리고 그 뜻에 순종합니다.
14. 그러므로 ‘구원과 능력’을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
이제 오늘의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구원받음과 능력 받음은 따로따로입니까?”
성경 전체와 사도행전 8장을 종합하면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가장 균형 잡혀 있습니다.
첫째, 구원은 성령의 사역 없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우리를 그리스도께 연합시키십니다.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참된 구원과 성령은 분리할 수 없습니다.
둘째, 구원받은 사람도 계속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의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명령처럼 성령의 통치를 계속 받아야 합니다.
셋째, 성령의 은사와 능력은 구원의 대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돈으로 살 수도 없고 인간이 조종할 수도 없습니다.
넷째, 사도행전 8장의 사마리아 사건은 구원 이후의 ‘제2의 축복’을 모든 시대의 공식으로 만드는 본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마리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교회의 사도적 증언으로 확증하는 구속사적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섯째, 성령의 능력은 반드시 선교와 증언을 향합니다.
성령이 임하신 목적은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15. 마지막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능력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미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미 받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죄를 회개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미 용서해야 할 사람을 용서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미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미 가야 할 자리에 가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미 전해야 할 복음을 전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8장의 빌립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도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했고 복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로 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가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위대하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내가 가진 능력이 작아도 괜찮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내 인생이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여도 괜찮습니다.
하나님께 붙들려 있다면, 그 흩어짐도 선교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눈물도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실패도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고난도 하나님의 손에서 복음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 뒤에 부활이 있듯이, 순종 뒤에 열매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면, 우리의 인생은 결국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이야기가 됩니다.
영성 깊은 기도
거룩하시고 살아 계신 성령 하나님, 오늘 사도행전 8장의 말씀 앞에 우리의 마음을 내려놓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성령의 능력을 원하면서도 성령의 통치는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원하면서도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면서도 예수님만 높아지기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시몬의 마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내가 큰 자가 되게 해 달라”는 마음을 버리게 하시고, “주님, 나는 작아지고 주님만 커지게 하소서”라고 고백하게 하옵소서.
성령 하나님, 우리 안에 계셔 주옵소서.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의 욕망을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의 상처를 만져 주시고,
우리의 교만을 꺾어 주시고,
우리의 두려움을 믿음으로 바꾸어 주옵소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되 그 능력이 우리를 높이는 도구가 되지 않게 하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가정이 사마리아가 되게 하시고, 우리의 직장이 사마리아가 되게 하시고,
우리의 일터가 복음의 현장이 되게 하시고, 우리의 삶 전체가 예배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가 지금 고난 가운데 있다면 그 고난을 실패라고 단정하지 않게 하옵소서.
십자가 뒤에 부활이 있음을 믿게 하시고, 흩어짐 뒤에 하나님의 선교가 있음을 믿게 하시고,
눈물 뒤에 열매가 있음을 믿게 하옵소서.
우리의 인생에서 사라진 것들만 보지 말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그 빈자리에 무엇을 시작하고 계시는지를 보게 하옵소서.
성령님, 우리를 충만하게 하옵소서.
그러나 단순히 뜨겁게만 하지 마시고 거룩하게 하옵소서. 감동만 주지 마시고 순종하게 하옵소서.
눈물만 흘리게 하지 마시고 삶을 변화시켜 주옵소서.
예배할 때만 성령충만한 사람이 아니라, 일할 때에도 성령충만하고, 사람을 만날 때에도 성령충만하고,
고난 가운데서도 성령충만하며,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도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마지막 고백이 “내가 얼마나 큰 일을 했는가”가 아니라
“나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드러나셨는가”가 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우리를 세상 가운데 보내시는 성령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빌립처럼 순종하게 하시고,
사마리아를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며,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통하여 누군가가 예수님을 만나게 하옵소서.
우리의 구원이 성령의 역사임을 믿습니다.
우리의 성화도 성령의 역사임을 믿습니다.
우리의 사명도 성령의 능력으로 감당해야 함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성령님, 나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라고 고백합니다.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내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내 이름보다 예수님의 이름을,
내 능력보다 하나님의 능력을 선택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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