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칼럼] 복음 들여다보기

[영성 칼럼] 너는 내가 택한 그릇이다(사도행전 9장) 교회는 소비하는 곳이 아니라 함께 사명을 감당하는 공동체입니다.

knowledgeplatform100 2026. 9. 7. 09:02

남을 위해 살라 ― 너는 내가 택한 그릇이다(사도행전 9장 15절, 36–43절)

오늘 단순히 “착하게 삽시다.” “다른 사람을 도와줍시다.”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남을 위해 사는 삶”은 도덕적인 선행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 고린도후서 5장 15절

 

복음의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사셨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나만을 위해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단순한 윤리적 명령이 아닙니다.

 

“남을 위해 살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너를 위해 사셨으니 이제 너도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라”는 복음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가장 강력하게 보여주는 말씀이 바로 사도행전 9장 15절입니다.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사울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이 사람은 이방 사람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서 내 이름을 전하도록 선택한 내 도구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선택한 내 도구.” 

사울은 자기를 위해 선택받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 명예를 위해 선택받은 것도 아닙니다.

자기 성공을 위해 선택받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선택받았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 가운데 하나는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를 흘려보내는 그릇으로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1.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의 방향이 바뀝니다

사도행전 9장은 아주 강렬하게 시작합니다.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사울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사울은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열심은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자기 의를 위한 열심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대적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중심적인 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서도 자기 뜻을 중심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봉사하면서도 자기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봉사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있으면서도 “교회가 나에게 무엇을 해주어야 하는가?”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여기에서 사울의 인생이 무너집니다. 그가 알게 된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가 박해했던 사람들이 사실은 예수님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을 깨닫습니다.

 

교회를 박해한 것이 곧 그리스도를 박해한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사울의 가치관이 무너집니다.

그리고 그는 눈이 멀게 됩니다. 성경은 사울이 사흘 동안 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이 사흘은 단순히 육체적인 시각을 잃어버린 시간이 아닙니다. 자기 확신이 무너지는 시간입니다.

자기 의가 무너지는 시간입니다. 자기 인생의 방향이 바뀌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을 진짜 만나면 방향이 바뀝니다.

예전에는 “내가 무엇을 얻을까?”가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 제가 무엇을 할까요?”가 중요해집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가 중요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에 사용하기 원하실까?”가 중요해집니다. 예전에는 “내 인생은 내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고백합니다. “주님,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2. “너는 내가 택한 그릇이다”

사울이 다메섹에서 눈이 멀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아나니아입니다. 아나니아는 평범한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나니아야.”

아나니아가 대답합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러자 주님께서 사울에게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아나니아는 두려웠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십니까?”

 

“그가 예루살렘에서 성도들에게 얼마나 큰 해를 끼쳤는지 모르십니까?”

“그가 지금 여기 온 목적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기 위해서 아닙니까?”

 

아나니아에게는 충분히 합리적인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입니다.

“가거라! 이 사람은 이방 사람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서 내 이름을 전하도록 선택한 내 도구다.”

 

여러분, 이것이 복음입니다. 아나니아의 눈에는 사울이 위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사울이 택한 그릇이었습니다. 아나니아의 눈에는 과거가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미래가 보였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이 저지른 일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울을 통해 앞으로 이루실 일을 보셨습니다.

여기에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보다 하나님의 목적을 더 크게 보십니다.

 

사울은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교회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바꾸셨습니다.

사울은 성도들을 끌어내어 감옥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셨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의 이름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을 전하는 도구가 되어라.”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3.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는 것은 특권만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신학적 원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선택”을 자꾸 특권으로만 생각합니다.

“나는 선택받았다.” “나는 구원받았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맞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의 선택은 언제나 사명과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왜 부르셨습니까? 창세기 12장 2절입니다.

“너는 복이 될지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복받는 사람으로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복이 되는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과 단절하여 자기들만 잘 살라고 부름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세상에 나타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도 바울에게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너는 선택받았다.” 그런데 왜 선택받았습니까?

“내 이름을 전하도록.”

여러분, 선택받음은 사명을 위한 선택입니다. 구원받음은 섬김을 위한 구원입니다.

은혜를 받은 것은 은혜를 흘려보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은 나에게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9장 15절은 오늘 말씀의 제목인 “남을 위해 살라”와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너는 내가 택한 그릇이다.” 그런데 그릇은 무엇을 합니까? 그릇 안에만 담아놓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곳에 부어주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은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또 다른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여기서 아나니아를 보십시오. 하나님은 직접 사울을 만드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아나니아를 보내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를 통해 사울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가서 손을 얹고 말합니다.

“형제 사울아…”

 

이 한마디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원수 사울아”가 아닙니다. “박해자 사울아”도 아닙니다. 

“형제 사울아.” 복음은 사람을 원수에서 형제로 바꿉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자기 눈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울을 위해 기도하고 안수합니다. 그 순간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집니다. 

 

그리고 사울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일은 혼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사람을 살리십니다.

이것이 교회의 신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나니아를 사용하신 이유를 단순히 개인적인 기적에 두지 않고,

교회 공동체를 세우고 함께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는 데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관객석이 아닙니다. 교회는 소비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내가 서비스를 받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함께 사명을 감당하는 공동체입니다.

 

5. 그리고 사도행전 9장에는 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도르가입니다. 사도행전 9장 36절입니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그 여자가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여기서 아주 중요한 표현이 있습니다. 성경은 도르가를 먼저 “부자였다”고 소개하지 않습니다. “유명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권력이 있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녀의 삶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는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삶이었습니다.

도르가의 아름다움은 외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선행과 구제를 통해 나타나는 아름다움이라고 강조합니다.

 

도르가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다비다이며 헬라어로 도르가입니다. 

둘 다 ‘가젤’, 즉 아름답고 민첩한 사슴과 관련된 이름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녀의 이름만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삶이 아름다웠습니다. 왜 아름다웠습니까?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았기 때문입니다.

 

6. 믿음은 반드시 삶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에서 복음과 선행의 관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선행을 통해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은 분명히 말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구원은 은혜입니다. 구원은 선물입니다. 우리의 공로가 아닙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2장은 10절에서 곧바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구원은 행위에서 나오지 않지만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선한 삶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선행은 구원의 뿌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선행은 구원의 열매입니다. 믿음이 뿌리라면 사랑의 섬김은 열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신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밖으로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2장은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요한일서 3장 18절도 말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도르가는 말만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실제로 옷을 만들었습니다. 실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왔습니다.

실제적으로 과부들을 섬겼습니다. 실제적으로 사랑했습니다.

 

7. 도르가는 평범한 재능을 거룩한 사명으로 바꾸었습니다

도르가가 무엇을 잘했습니까? 옷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보면 아주 평범한 기술입니다.

그러나 도르가는 그 평범한 기술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했습니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특별한 능력만 사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작은 재능도 하나님께 드리면 사명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말을 잘합니다.

어떤 사람은 가르치는 일을 잘합니다.

어떤 사람은 음식을 잘 만듭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을 잘 돌봅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를 잘합니다.

어떤 사람은 행정 일을 잘합니다.

어떤 사람은 음악을 잘합니다.

어떤 사람은 운전을 잘합니다.

어떤 사람은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을 잘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줍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평범한 재능이 하나님께 드려질 때 거룩한 사명이 됩니다. 도르가는 옷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옷을 통해 사람들에게 사랑을 입히셨습니다.

 

8. 충만한 사람은 흘러넘치는 사람입니다

본문은 도르가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특별히 강조한 것이 바로 충만입니다.

 

컵에 물이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으로 끝나면 충분한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 물이 들어오면 어떻게 됩니까? 물이 넘칩니다. 그것이 충만의 이미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속 공급하시기 때문에 계속 흘려보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내가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가 핵심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계속 공급하고 계시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에게서 사랑을 공급받으십시오. 그러면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용서를 공급받으십시오. 

그러면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은혜를 공급받으십시오. 그러면 은혜를 베풀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위로를 공급받으십시오. 그러면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힘을 공급받으십시오. 그러면 지친 사람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9. 엘리야 시대의 과부처럼 공급받는 삶

열왕기상 17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르밧 과부에게는 가루와 기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자 가루가 떨어지지 않았고 기름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속 공급하셨습니다.

 

도르가의 삶과 연결하여, 하나님의 공급을 받는 사람이 계속해서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남을 위해 살 수 있는 이유는 내가 강해서가 아닙니다. 내가 가진 것이 많아서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계속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를 채워주십시오.” 그런데 거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하나님, 저를 채워주셔서 제가 다른 사람을 살리는 통로가 되게 하소서.” 이것이 진짜 충만입니다.

 

10. 도르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이 울었습니다

도르가가 병들어 죽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사람들이 베드로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과부들이 울면서 도르가가 만들어준 옷을 보여줍니다.

 

“이 옷을 보십시오.” “이것도 도르가가 우리에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이 사람을 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죽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장례식장의 화환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남긴 사랑의 흔적입니다. 도르가는 많은 것을 남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특별히 기록하는 것은 그녀가 사람들에게 남긴 사랑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 세상을 떠난다면 사람들이 여러분을 무엇으로 기억하겠습니까?

돈입니까?

직장입니까?

집입니까?

자동차입니까?

직함입니까?

명예입니까?

아니면 “그 사람 때문에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나를 위해 기도해주었습니다.”

“그 사람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습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복음을 전해주었습니다.”

“그 사람이 내가 힘들 때 곁에 있어주었습니다.” 이런 기억을 남기시겠습니까?

 

11.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도르가를 다시 일으키십니다

베드로가 도착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내보냅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그 순간 도르가가 눈을 뜹니다. 그리고 일어납니다.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적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9장 4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보십시오. 도르가가 살아난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주를 믿었습니다.

기적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도록 하는 통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기적의 방향입니다. 기적은 사람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면 그 능력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

 

12. 사도행전 9장의 모든 이야기는 하나로 연결됩니다

이제 사도행전 9장을 전체적으로 보십시오. 처음에는 사울이 나옵니다. 사울은 다른 사람을 해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택한 그릇으로 만드십니다. 

 

그다음 아나니아가 등장합니다. 아나니아는 두려웠지만 사울에게 갑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다음 베드로가 등장합니다. 베드로는 병든 사람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도르가가 등장합니다. 

 

도르가는 평생 다른 사람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여러분, 이 모든 사건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복음을 전하는 도구가 됩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회복시키는 도구가 됩니다.

베드로는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하는 도구가 됩니다.

도르가는 가난한 자를 섬기는 도구가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13. 교회는 크루즈선이 아니라 구조선입니다

교회는 크루즈선이 아니라 전투선, 혹은 구조선과 같은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크루즈선에서는 사람들이 서비스를 받습니다. 편안한 의자에 앉습니다. 좋은 음식을 먹습니다. 경치를 구경합니다.

 

그러나 구조선은 다릅니다.

누군가 물에 빠져 있으면 달려갑니다. 누군가 죽어가면 구하러 갑니다. 누군가 아파하면 찾아갑니다.

누군가 길을 잃으면 찾아갑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나에게 무엇을 제공해 주는가?”만 묻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주님, 오늘 제가 누구를 살릴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공동체입니다.

 

14. 사울의 사명과 도르가의 사명은 크기가 달랐지만 본질은 같았습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봅니다. 사울은 수많은 나라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왕들 앞에도 섰습니다.

역사적으로 엄청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도르가는 무엇을 했습니까? 옷을 만들었습니다.

 

사울과 도르가의 사역 규모는 전혀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크기가 아니라 충성이 중요합니다.

사울은 말씀을 전했습니다. 도르가는 옷을 만들었습니다. 아나니아는 한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베드로는 한 병든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작은 순종을 통해 큰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자꾸 큰 일을 해야 하나님께 쓰임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람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리에서 충성하는 것,
오늘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을 살리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15. “남을 위해 살라”는 결국 예수님을 닮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도르가가 남을 위해 살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녀를 본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나니아가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본받는 것도 아닙니다. 베드로가 훌륭하기 때문에 본받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 마가복음 10장 45절

 

예수님은 섬김받으러 오지 않으셨습니다. 섬기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높아지려고 오지 않으셨습니다. 낮아지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보존하려고 오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추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영성입니다.

자기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낮추는 것.

자기를 채우는 것만이 아니라 흘려보내는 것.

자기 이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

내 유익만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돌아보는 것.

 

16.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오늘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돈을 위해 삽니까?

성공을 위해 삽니까?

자녀를 위해 삽니까?

명예를 위해 삽니까?

사람들의 인정을 위해 삽니까? 

 

물론 이런 것들도 삶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인생의 최종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주님, 제가 오늘 누구를 살릴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이 생기기 시작하면 우리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가정에서도 달라집니다.

교회에서도 달라집니다.

직장에서도 달라집니다.

사회에서도 달라집니다.

 

17. 오늘 내 주변에 있는 “한 사람”을 보십시오

어쩌면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에게 특별한 사명을 주실지도 모릅니다.

아나니아에게는 사울 한 사람이었습니다. 도르가에게는 과부들이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애니아와 도르가였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누구입니까?

아픈 사람이 있습니까? 전화 한 통 해보십시오.

외로운 사람이 있습니까? 찾아가십시오.

상처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들어주십시오.

신앙을 떠난 사람이 있습니까? 정죄하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십시오.

교회 안에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먼저 다가가십시오.

가족 가운데 마음이 무너진 사람이 있습니까? 말 한마디를 따뜻하게 건네십시오.

남을 위해 사는 삶은 거창한 데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에서 시작됩니다.

 

18. 선택받은 그릇은 고난도 함께 받습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은 16절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사울을 “택한 그릇”이라고 하신 다음 곧바로 말씀하십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에는 사명이 있고 그 사명에는 때로 고난이 따릅니다.

사울이 선택받았다는 것은 편안한 삶을 보장받았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복음을 위해 고난받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쓰임받는다”는 말을 “내 인생이 편해진다”는 의미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때로는 더 어려워집니다.

더 많이 포기해야 합니다.

더 많이 섬겨야 합니다.

더 많이 용서해야 합니다.

더 많이 견뎌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길입니다.

 

19. 진짜 충만은 흘러넘칠 때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것입니다.

“하나님께 충만하게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람으로 살아간다.”

 

도르가는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나누었습니다. 아나니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을 살렸습니다. 베드로는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도르가가 다시 일어났습니다. 사울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흐름입니다.

하나님 → 나 → 다른 사람 → 또 다른 사람 → 세상

 

은혜가 나에게서 멈추면 그것은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축복을 가두어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만 잘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이 살아나도록 주신 것입니다.

 

20. 오늘 우리의 기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우리의 기도를 바꾸어 봅시다.

“하나님, 나에게 복을 주세요.” 여기에서 끝나지 말고, “하나님, 나를 복의 통로로 사용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나를 채워주세요.” 여기에서 끝나지 말고, “하나님, 나를 채우셔서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 주세요.” 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나를 높여주세요.” 대신 “하나님, 예수님의 이름이 높아지도록 나를 사용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내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라고만 말고, “하나님, 내 문제를 통과하는 과정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되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하십시오.

 

21. 결론 — “너는 내가 택한 그릇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가 택한 그릇이다.”

이 말씀은 목회자에게만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선교사에게만 주시는 말씀도 아닙니다.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시는 말씀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각자의 자리에서 사명을 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으로 섬깁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로 섬깁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로 섬깁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직업으로 섬깁니다.

어떤 사람은 손으로 섬깁니다.

어떤 사람은 눈물로 섬깁니다.

어떤 사람은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으로 섬깁니다.

어떤 사람은 병든 사람을 돌봅니다.

어떤 사람은 다음 세대를 세웁니다.

어떤 사람은 선교를 위해 자신의 삶을 드립니다.

중요한 것은 크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려졌느냐입니다. 

 

사울처럼 위대한 사명을 감당할 수도 있습니다. 도르가처럼 이름 없이 한 사람을 섬길 수도 있습니다.

아나니아처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순종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 모든 것이 귀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사람을 살리고
복음을 확장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기억해야 할 세 문장

첫째, 나는 나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신 것은 나만 복받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살리는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셋째,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나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5절을 다시 기억하십시오.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제자도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남을 위해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오늘의 실천

오늘 집에 돌아가시기 전에 한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 오늘 제가 누구를 살릴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 사람에게 전화하십시오. 문자를 보내십시오. 기도하십시오. 찾아가십시오. 도와주십시오. 용서하고 복음을 전하십시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선택하신 것은 여러분의 인생을 여러분만을 위해 쓰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통해 누군가가 살아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그릇입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직업도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물질도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시간도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재능도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평범한 하루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거룩한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나를 위해 살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위해 사십시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남을 위해 사십시오.

그때 우리의 삶을 통하여 사도행전 9장 42절의 역사가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우리의 선행이 우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하여 예수님이 드러나게 하십시오.

우리의 섬김이 우리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게 하십시오.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한 사람이 살아나고, 한 가정이 회복되고, 한 영혼이 예수님께 돌아오고, 한 교회가 다시 사명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는 자꾸만 나 자신을 위해 살려고 했습니다.

 

내 유익을 생각하고, 내 성공을 생각하고, 내 이름을 생각하고, 내 편안함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 오늘 사도행전 9장 15절의 말씀을 들으며 우리의 인생이 누구의 것인지 다시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너는 내가 택한 그릇이다.” 주님, 우리를 선택하여 주셨다면 우리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사울을 선택하셔서 이방인과 왕들과 이스라엘 앞에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나타내게 하여 주옵소서.

 

아나니아처럼 두려움이 있어도 순종하게 하시고, 도르가처럼 우리에게 주신 작은 재능과 물질과 시간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살리게 하시며, 베드로처럼 사람의 아픔 앞에서 외면하지 않고 기도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를 충분한 사람이 아니라 충만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우리 안에 은혜를 계속 부어주셔서 우리 안에서 멈추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가정이 사람을 살리는 가정이 되게 하시고, 우리의 교회가 사람을 소비하는 크루즈선이 아니라
영혼을 살리는 구조선이 되게 하시며, 우리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세상에 보여주는
거룩한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음을 잊지 않게 하시고,

이제는 더 이상 나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게 하옵소서.

 

오늘도 우리에게 한 사람을 보여주시고, 그 한 사람을 사랑하게 하시고, 그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게 하시고, 

그 한 사람에게 복음과 사랑을 흘려보내게 하옵소서.

 

우리의 인생 마지막에 “나는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몇 사람을 살리셨는가?”

를 돌아보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의 손에 올려드립니다.

 

“주님, 나는 주님의 그릇입니다. 나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