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칼럼] 복음 들여다보기

[영성 칼럼]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사도행전 7장)

knowledgeplatform100 2026. 9. 4. 09:09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외친 스데반의 "두려움 없는 삶" (사도행전 7장)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 7장을 통해 “두려움 없는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함께 묵상하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미래가 두렵습니다. 건강이 두렵습니다. 자녀의 미래가 두렵습니다. 경제적인 문제가 두렵습니다. 사람들의 평가가 두렵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죽음이 두렵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 두려움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7장에는 그 모습을 너무나 선명하게 보여주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죽어가는 사람의 얼굴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봅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그리고 다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리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이것이 성경이 보여주는 두려움 없는 삶입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핵심은 이것입니다. 두려움 없는 삶은 환경이 두렵지 않은 삶이 아니라,

환경보다 하나님의 주권을 더 크게 보는 삶입니다. 두려움 없는 삶은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삶입니다.

 

1. 스데반은 자기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사도행전 7장 1절에서 대제사장이 스데반에게 묻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냐?”

스데반은 지금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자기를 변호해야 합니다. 자기의 무죄를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성전을 모독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율법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놀랍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길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의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영광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여기서 스데반의 시선이 바뀝니다. 

나에게서 하나님께로. 내 문제에서 하나님의 역사로. 내 억울함에서 하나님의 섭리로.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내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만이 아닙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라는 질문만 하던 사람이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라고 묻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로 전환이 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첫 번째 영적 전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인생에 이해되지 않는 일이 있습니까?

그 일을 가지고 하나님께 따지기 전에,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 이것이 왜 일어났는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는 믿겠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2. 하나님은 장소보다 크시고, 상황보다 크시며, 역사보다 크십니다

스데반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어디에서 부르셨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에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메소보다미아에서 부르셨습니다.

 

사도행전 7장 2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여기서 중요한 표현이 있습니다. “영광의 하나님.”

 

하나님이 먼저입니다. 땅이 먼저가 아닙니다. 성전이 먼저가 아닙니다. 사람이 먼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계획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계획 속으로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지만 즉시 모든 것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7장 5절을 보면 아브라함에게 “발 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후손을 통해 이루어질 약속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믿음의 중요한 원리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성취 사이에는 시간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약속했다고 즉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시간이 길어진다고 약속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았지만 약속의 완성을 전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신실하셨습니다.

 

3.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은 기다림을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면 왜 상황이 더 어려워집니까?”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면 왜 요셉처럼 고난을 당합니까?”

 

그러나 사도행전 7장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부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연은 하나님의 실패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삶에서도 일하셨고, 요셉의 삶에서도 일하셨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애굽에 팔았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요셉의 인생은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7장 9절은 놀라운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형들은 요셉을 팔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환경은 요셉을 애굽으로 끌고 갔지만, 하나님은 그곳에서도 요셉과 함께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요셉을 애굽의 통치자로 세우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봅니다.

 

사람은 요셉을 팔았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사용하셨습니다. 

사람은 요셉의 인생을 망가뜨리려 했지만 하나님은 그 인생을 구원의 도구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4.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에서 보이지 않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결과가 나타나야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생각합니다.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로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결과가 보이기 전에도 일하십니다.

 

요셉이 감옥에 있을 때도 하나님은 일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을 아직 소유하지 못했을 때도 하나님은 일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도 하나님은 일하셨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일하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이 혹시 감옥처럼 느껴집니까?

아무 변화도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까?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 같습니까?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습니까?

 

그렇다면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일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에 하나님께서 가장 깊은 일을 하고 계실 수 있습니다.

 

5. 그런데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스데반의 설교가 계속되면서 매우 중요한 패턴이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구원자를 보내셨지만 그 구원자를 반복해서 거부했습니다.

 

요셉을 형제들이 거부했습니다. 모세를 거부했습니다. 선지자들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의로우신 분,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7장의 비극입니다.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계속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하나님을 자기 뜻에 맞추는 것이 더 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때로는 하나님을 “소유”하려 합니다.

“하나님, 이것은 제 뜻대로 해주세요.”

“하나님,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인도해주세요.”

“하나님, 제가 원하는 사람을 붙여주세요.”

“하나님, 제가 원하는 결과를 주세요.”

이것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나의 인생 계획에 참여시키려는 것입니다.

 

6.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성전과 율법을 자기들의 소유처럼 생각했고, 결국 하나님까지 자기들이 소유한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로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내가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아십니까?

내가 하나님을 소유한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이 내 뜻에 맞아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소유라고 믿으면 내가 하나님의 뜻에 맞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본주의와 인본주의의 차이입니다.

인본주의는 내가 중심입니다. 신본주의는 하나님이 중심입니다.

인본주의는 “하나님, 나에게 무엇을 해주시겠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신본주의는 “하나님, 오늘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라고 묻습니다.

 

 

7.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 예수 그리스도—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사도행전 7장 37-60절)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반드시 붙들어야 할 한 문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선지자를 들으라.”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스데반이 이 말씀을 단순히 모세에 대한 이야기로 끝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모세를 이야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모세를 이야기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광야를 이야기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교회를 말합니다.

성막을 이야기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임재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야기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죄, 곧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을 거부하는 인간의 마음을 폭로합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7장 37절은 단순히 “예수님은 모세와 비슷한 분이다.” 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이렇게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래전 모세를 통하여 약속하신 그 선지자가 오셨다.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이렇게 정했습니다.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 예수 그리스도 —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1) 스데반은 왜 모세 이야기를 그렇게 길게 했는가?

사도행전 6장을 보면 스데반은 심각한 고발을 당했습니다. 사람들은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과 성전을 모독했다고 거짓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7장에서 대제사장이 묻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냐?” 그러자 스데반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단순히 “나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역사를 처음부터 다시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 요셉, 모세, 여호수아, 다윗, 솔로몬. 왜 그랬을까요?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하나의 거대한 영적 패턴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패턴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게 구원자를 보내셨지만, 인간은 반복해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을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요셉을 통하여 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모세를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이상한 반복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보내시면 인간은 거부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인간은 자기 생각을 주장합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면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이 구원자를 보내시면 인간은 자기 방식의 구원자를 원합니다.

 

그래서 스데반의 설교는 단순한 역사 강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거울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여주면서 당시 사람들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도 너희 조상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있지 않느냐?”

그리고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묻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가?”

(2) 모세는 마지막 목적지가 아니라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지판입니다

사도행전 7장 37절은 신명기 18장 15절을 배경으로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약속했습니다. “나와 같은 선지자를 하나님께서 세우실 것이다.”

 

신명기 18장 1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키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입에 두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은 이 약속을 다시 꺼냅니다. 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약속의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도행전 3장에서도 베드로가 이미 신명기 18장의 이 말씀을 예수님에게 적용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은 갑자기 새로운 주장을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모세와 같은 선지자이십니까?

모세와 예수님 사이에는 분명한 평행점이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도 아버지께 보내심을 받으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이끌어냈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에게 전달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말씀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종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십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언약을 중재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히브리서 3장은 모세의 위대함을 인정하면서도 그리스도께서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으실 분임을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단순히 “제2의 모세”가 아닙니다. 모세가 그림자라면 예수님은 실체입니다.

모세가 약속을 전달했다면 예수님은 약속의 성취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왔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셨습니다.

 

모세가 출애굽을 이끌었다면 예수님은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궁극적인 출애굽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변화산에서 영광 가운데 나타나셨을 때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계셨지만, 하늘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마지막 명령은 “모세를 연구하라.” 가 아닙니다. “율법을 자랑하라.” 가 아닙니다.

“종교적 전통을 지켜라.” 가 아닙니다. “그의 말을 들으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3) 신앙의 가장 큰 위기는 말씀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몰랐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막도 있었습니다.

성전도 있었습니다.

제사도 있었습니다.

절기도 있었습니다.

선지자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록한 전통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그리고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에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말씀을 가지고 있으면서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말씀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서도 하나님의 뜻보다 내 뜻을 붙들 수 있습니다.

예배하면서도 하나님보다 내 만족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가장 무서운 상태는 “나는 하나님을 모른다.” 라고 말하는 상태가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나는 하나님을 잘 안다.” 라고 생각하면서 실제로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상태일 수 있습니다.

(4) 광야의 우상은 오늘 우리의 마음에도 만들어집니다

스데반은 40년 광야 이야기를 꺼냅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에게 요구합니다.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만들라.” 그리고 금송아지를 만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우상숭배가 무엇인지 보아야 합니다.

 

우상은 단순히 돌이나 나무로 만든 조각상이 아닙니다. 우상의 본질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고, 하나님 대신 내가 원하는 대상을 붙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는 것만이 우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도 우상입니다.

 

돈이 나의 하나님이 될 수 있습니다.

성공이 나의 하나님이 될 수 있습니다.

자녀가 나의 하나님이 될 수 있습니다.

명예가 나의 하나님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인정이 나의 하나님이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의 성장과 사역의 성취도 하나님보다 앞서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우상은 종교적인 모양을 가진 우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완전히 버리고 다른 나라로 도망간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름으로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의 교묘함입니다.

 

우상은 하나님과 반대편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마음 안에서도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가?” 여기에서 멈추면 안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가?”

(5) 광야에서 백성들이 만든 것은 금송아지였지만, 오늘 우리가 만드는 우상은 훨씬 정교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금송아지를 만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상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모양만 달라졌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우상은 돈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우상은 성공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자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의 명예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의 감정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편한 것.” “내가 인정받는 것.” 이것이 하나님보다 중요해질 때 우상이 됩니다.

 

그래서 우상숭배의 핵심은 손에 무엇을 들고 있느냐가 아니라 마음의 왕좌에 누가 앉아 있느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그리고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탐심을 우상숭배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내 손에서 우상을 빼앗아 주십시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깊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주님, 내 마음의 왕좌에서 나를 내려놓게 하시고 주님을 왕으로 모시게 하소서.”

(6) 그런데 이스라엘의 문제는 우상만이 아니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성막과 성전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성막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집을 사모했습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이사야 66장을 인용하면서 놀라운 말을 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이고 땅이 하나님의 발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데반은 성전을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성전의 참된 의미를 회복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가두는 건물이 아닙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소유물이 되시는 장소가 아닙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고 만나 주시는 은혜의 표지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선물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성전을 주셨는데 성전을 사랑합니다.

율법을 주셨는데 율법을 자랑합니다.

예배를 주셨는데 예배 형식을 붙듭니다.

교회를 주셨는데 교회 자체를 우상화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순간, 선물이 우상이 됩니다.

(7) 교회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교회는 거룩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 공동체가 항상 거룩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뜻보다 인간의 성공을 자랑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교회의 규모가 하나님의 임재보다 중요해지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교회의 프로그램이 복음보다 중요해지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람의 평가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중요해지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목회자의 명예가 예수님의 영광보다 중요해지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교회의 전통이 성경의 진리를 가리기 시작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의 말씀은 오늘 교회에도 매우 날카롭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너희가 만든 틀 안에 가두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은 우리의 소유가 아닙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가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단이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신학이 하나님을 완전히 가두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만든 상자보다 크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8) “살아 있는 말씀”을 주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도행전 7장 38절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깊은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문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도 살아서 역사합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활력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하나님 앞에 세우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나를 위로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를 찌릅니다.

말씀은 나를 격려하지만 동시에 나의 죄를 폭로합니다.

말씀은 내 상처를 싸매지만 동시에 내가 붙들고 있는 우상을 깨뜨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진정으로 만났다면 반드시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말씀을 읽었는데도 내가 그대로라면,

말씀을 들었는데도 교만이 그대로라면,

말씀을 묵상했는데도 용서하지 못한다면,

말씀을 공부했는데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말씀을 읽었을 뿐, 말씀 앞에 선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9) 스데반의 설교가 결국 예수님에게 도달하는 이유

이제 사도행전 7장의 전체 흐름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아브라함에서 시작합니다. 요셉이 나옵니다. 모세가 등장합니다. 광야가 나옵니다. 성막이 나옵니다. 다윗이 등장합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선지자들과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합니다. 

 

이 모든 역사는 하나의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일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반복해서 그 구원의 역사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그 거부가 가장 극적으로 나타난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스데반은 결국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를 박해했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의인을 죽였으며,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죽인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설교가 이렇게 강력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의 문제가 지식 부족이 아니라 마음의 반역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0)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사도행전 7장 51절은 스데반 설교의 절정입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굉장히 강한 말씀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말했습니까? 사랑이 없어서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진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병을 발견한 의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사랑입니까? 아닙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죄라고 말하지 않으면 복음의 은혜도 사라집니다.

 

십자가는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줍니다. 동시에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줍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정죄만을 위한 설교가 아닙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입니다.

“돌아오라.”

“그리스도를 받아들여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라.”

“성령을 거스르지 말라.”

이것이 스데반의 외침입니다.

(11) 오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스데반의 설교를 들으면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저 사람은 우상을 섬기고 있구나.”

“저 교회가 문제구나.”

“저 사람들은 말씀을 거부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스데반의 설교를 잘못 듣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먼저 나에게 들려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자신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정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가?

내가 원하는 말씀만 듣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를 위로하는 말씀만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성공을 약속하는 말씀만 좋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회개하라는 말씀은 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용서하라는 말씀은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부담스러워하지 않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뒤로 미루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신앙은 입술의 고백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데까지 가야 합니다.

(12) “그의 말을 들으라”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받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종교 지도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둘째, 예수님의 말씀을 삶의 최종 권위로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내 감정이 최종 권위가 아닙니다.

세상의 유행이 최종 권위가 아닙니다.

사람의 평가가 최종 권위가 아닙니다.

내 경험도 최종 권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최종 권위입니다.

 

셋째, 성령의 인도에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이 성령을 거스른다고 책망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께 민감해야 합니다.

 

넷째, 우상을 내려놓으라는 뜻입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보다 잃기 싫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보다 끝까지 붙들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8. 그래서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의 성전 논쟁을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스데반은 성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성전이라는 장소 안에 가두려는 생각을 비판합니다.

 

사도행전 7장 48절입니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건물보다 크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종교적 틀보다 크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하나님에 대한 개념보다 크십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내가 하나님을 내 삶에 끌어들이는 시간”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 앞에 내려놓아지는 시간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진정한 예배는 내가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9. 예배의 중심에는 반드시 ‘내가 죽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예배는 단순히 찬양을 부르는 시간이 아닙니다.

예배는 단순히 교회에 출석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배는 단순히 좋은 말씀을 듣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예배에는 반드시 자아의 죽음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것이 예배입니다.

내 뜻이 죽고 그리스도의 뜻이 살아나는 것. 내 욕망이 죽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살아나는 것.

내 교만이 죽고 그리스도의 겸손이 살아나는 것. 내가 중심에서 내려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심에 서시는 것.

 

10. 그렇다면 두려움 없는 삶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이제 오늘 설교의 중심으로 들어갑니다. 스데반이 왜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죽음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죽음이 너무나 현실적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돌이 날아왔습니다. 몸이 찢어졌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그 순간 죽음 너머에 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사도행전 7장 55절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그리고 56절에서 외칩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이 장면이 놀랍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서 계십니다. 스데반을 맞이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스데반이 땅에서 죽어가고 있을 때, 하늘에서는 예수님이 일어나 계십니다. 

땅에서는 사람들이 스데반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예수님이 스데반을 맞이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세상이 나를 버려도 예수님이 나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11. 두려움 없는 사람은 미래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미래를 붙들고 계신 분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래를 다 아는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1년 뒤도 모릅니다. 10년 뒤는 더더욱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의 미래를 붙들고 계십니다.

그래서 두려움 없는 삶은 “나는 아무 일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하는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주님이 나와 함께하신다.” 라고 고백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다릅니다. 믿음은 고난이 없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12. 스데반은 죽는 순간에도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스데반의 마지막 모습을 보십시오. 사도행전 7장 59절입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그리고 60절입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무엇이라고 기도하셨습니까?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스데반은 죽는 순간까지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여기서 진정한 성도의 성숙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성도의 목표는 고난을 피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단순히 비극적인 죽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한 사람의 삶 속에서 재현된 사건입니다.

 

13. 그리고 그 자리에는 사울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7장 58절을 보면 아주 중요한 이름이 하나 나옵니다. 사울입니다.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보면 스데반은 죽었고 사울은 살아남았습니다.

누가 이겼습니까? 사람의 눈으로 보면 사울이 이긴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전혀 다릅니다.

 

스데반은 죽었지만 그의 증언은 죽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의 기도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울은 훗날 사도 바울이 됩니다.

 

물론 성경은 사울의 회심을 스데반의 기도에 대한 직접적인 인과관계라고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이 복음의 패배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 역사 속에서도 복음의 길을 열어 가셨습니다.

스데반은 죽었지만 복음은 전진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14.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죽음을 이야기하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을 피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고 말씀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어떤 소망을 가지고 죽느냐입니다.

스데반은 죽음을 보면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죽음 너머에 부활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4절은 말합니다.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

그리고 57절은 선언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이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무덤이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질병이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실패가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고난이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마지막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십니다.

 

15. 그래서 두려움 없는 삶은 ‘부활을 믿는 삶’입니다

초대교회의 복음은 단순한 도덕적 교훈이 아니었습니다.

“착하게 살아라.” “좋은 사람이 되어라.”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중심이 아닙니다. 

 

복음의 중심은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도 부활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을 설명한 뒤 마지막에 이렇게 외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왜입니까?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끝이라면 우리의 수고도 헛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수고는 헛되지 않습니다.

 

16.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두려움 없는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시대에도 수많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경제적 두려움이 있습니다.

질병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자녀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노년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버림받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스데반을 보십시오. 그는 세상이 가장 두려워하는 순간에 가장 담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상처를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죽이는 사람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죽음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두려움 없는 삶입니다.

 

17. 오늘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문제를 보고 있습니까?

사람을 보고 있습니까?

돈을 보고 있습니까?

건강을 보고 있습니까?

미래를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있습니까?

 

시선이 어디에 있느냐가 우리의 영혼을 결정합니다. 문제를 바라보면 문제가 커집니다.

사람을 바라보면 사람의 평가에 흔들립니다. 돈을 바라보면 돈의 많고 적음에 흔들립니다. 미래만 바라보면 염려가 커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면, 문제보다 크신 주님을 보게 됩니다.

죽음보다 강하신 주님을 보게 됩니다. 세상보다 크신 주님을 보게 됩니다.

 

18. “나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로 넘어가십시오

아브라함의 인생은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야기였습니다.

요셉의 인생도 요셉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야기였습니다.

모세의 인생도 모세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야기였습니다.

스데반의 죽음도 스데반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이야기 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인생은 내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셨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속하셨으며, 성령께서 나를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 인생의 최종 주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 인생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19.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면 염려가 줄어듭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34절에서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내일이 아무 문제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일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내가 내일을 책임지려고 하면 두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일도 붙드신다는 사실을 믿으면 담대해집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오늘은 제가 충성하겠습니다. 내일은 하나님께 맡기겠습니다.” 이것이 두려움 없는 삶입니다.

 

20. 오늘 예배 가운데 다시 하나님께 주권을 돌려드리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이렇게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제가 제 인생의 주인이 되려고 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제 뜻에 맞추려고 했습니다.”

“제가 하나님보다 문제를 크게 보았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섭리보다 사람의 평가를 두려워했습니다.”

“제가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주님, 다시 주님의 자리에 앉으십시오.”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예수님입니다.

내 가정의 주인도 내가 아닙니다. 예수님입니다.

내 자녀의 주인도 내가 아닙니다. 예수님입니다.

내 미래의 주인도 내가 아닙니다. 예수님입니다.

내 생명의 주인도 내가 아닙니다. 예수님입니다.

 

21. 마지막으로, 스데반처럼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스데반이 마지막 순간에 본 것은 무엇입니까?

하늘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우리에게도 이것이 필요합니다.

 

환경이 바뀌기 전에 시선이 바뀌어야 합니다.

문제가 없어지기 전에 믿음이 생겨야 합니다.

미래를 다 알기 전에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죽음이 사라지기 전에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마지막 고백은 이것입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 고백은 죽을 때만 하는 고백이 아닙니다. 오늘 살아 있을 때 해야 하는 고백입니다.

“주님, 내 시간을 받으십시오.”

“내 재능을 받으십시오.”

“내 물질을 받으십시오.”

“내 가정을 받으십시오.”

“내 계획을 받으십시오.”

“내 미래를 받으십시오.”

“내 인생 전체를 받으십시오.”

그렇게 우리의 삶을 주님께 맡길 때, 우리는 비로소 두려움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결론 — 두려움 없는 삶은 하나님이 주인이신 삶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사도행전 7장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아브라함의 역사도, 요셉의 역사도, 모세의 역사도, 이스라엘의 역사도, 스데반의 역사도, 

그리고 우리의 역사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보다 크십니다.

요셉이 애굽에 있어도 하나님은 함께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함께하셨습니다. 스데반이 죽어가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함께하셨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건물이나 종교제도에 갇히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소유하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조종하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이용하기 위한 시간이 아닙니다. 예배는 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시간입니다.

넷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다섯째,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스데반처럼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문제보다 예수님을 크게 보십시오.

미래보다 예수님을 신뢰하십시오.

죽음보다 부활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오늘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내 인생은 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이 고백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한 문장

“두려움 없는 삶은 두려운 일이 없는 삶이 아니라,

모든 상황 속에서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마음에 새깁시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사도행전 7장 56절 
하늘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십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늘도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를 살아가십시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임을 믿게 하옵소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요셉과 함께하시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인도하시며,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우리의 눈이 환경에 머물지 않게 하시고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려고 했던 교만을 내려놓습니다. 내 뜻대로 하나님을 움직이려 했던 마음을 내려놓습니다.

 

하나님을 소유하려 하지 말게 하시고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우리의 예배가 형식으로 끝나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자아가 십자가 앞에서 죽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살아 역사하시게 하옵소서.

 

두려움이 찾아올 때 문제를 바라보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스데반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옵소서.

질병 앞에서도, 경제적인 어려움 앞에서도, 가정의 문제 앞에서도, 자녀의 문제 앞에서도, 노년의 불안 앞에서도, 죽음 앞에서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옵소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 고백이 우리의 마지막 고백이 되게 하시고,  오늘 우리의 삶 전체를 주님께 드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인생을 붙드시고 우리의 미래를 인도하시며 우리의 죽음 이후까지 책임지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게 하옵소서.

오늘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믿음으로, 하나님의 이야기를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