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하는 전도자 바울, 바울은 왜 일하며 선교했는가?
직업은 생계가 아니라 소명이며, 일은 하나님을 섬기는 선교가 될 수 있습니다
1. 우리는 왜 일하는가?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할 질문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왜 일해야 하는가?”
우리는 보통 이렇게 대답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입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입니다. 좋은 집을 얻고, 자녀를 교육하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이것들은 모두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훨씬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일을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창세기 1장 27~28절은 인간의 창조와 사명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다스리라…”
여기서 인간은 단순히 존재하기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돌보고 다스리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2장 15절도 말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따라서 일은 타락 이후에 생겨난 저주가 아닙니다. 일은 창조 때부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선한 사명이었습니다.
다만 타락으로 말미암아 일이 고통스럽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 17절입니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그러므로 성경적으로 말하면, 일 자체는 창조의 선물이지만, 일의 고통과 좌절과 착취는 타락의 결과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오늘 우리는 한 사람을 바라보려고 합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신학자였습니다. 선교사였습니다. 교회의 개척자였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바울은 동시에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천막을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바울에게 선교와 노동은 서로 분리된 두 개의 삶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시간과 일을 하는 시간이 서로 적대적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일하면서 복음을 살았고, 복음을 전하면서 일했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깁니다. 왜 바울은 굳이 일했을까요?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도라면 교회가 생활비를 지원하도록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실제로 성경은 복음 사역자가 교회로부터 지원받는 것이 정당하다고 분명히 가르칩니다.
고린도전서 9장 14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또한 디모데전서 5장 18절에서도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일했다는 사실은 복음 사역자가 경제적 지원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 자신도 사도의 권리와 생계를 위한 지원의 정당성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상황에서는 그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바로 여기에 바울의 직업관과 선교 전략, 그리고 복음에 대한 깊은 신학이 들어 있습니다.
2. 바울에게 일은 단순한 생계수단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일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8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여기에는 놀라운 변화가 나타납니다.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얼마나 벌 수 있는가?” 그러나 복음 안에서 변화된 사람은 질문이 달라집니다. “내가 일해서 누구를 살릴 수 있는가?”
세상은 말합니다. “더 많이 벌어라.” 그리고 이어서 말합니다. “더 많이 소비하라.”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더 많이 섬길 수 있도록 일하라.” 이것이 완전히 다른 직업관입니다.
일의 목적이 자기 자신에게서 이웃에게로 이동합니다. 돈의 목적도 자기 소비에서 사랑의 실천으로 이동합니다.
에베소서 4장 28절은 단순히 도둑질하지 말라는 소극적 명령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입니다.
즉, 일 → 소득 → 나눔 → 이웃의 유익 이라는 새로운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잠언 11장 25절도 말씀합니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고린도후서 9장 8절도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성경에서 일은 단순히 “먹고살기 위한 노동” 그 이상입니다.
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삶을 유익하게 하는 사랑의 통로입니다.
3. 바울은 일을 통해 복음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바울은 말로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먼저 그렇게 살았습니다.
사도행전 20장 34~35절에서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그리고 이어서 말합니다.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모본.” 바울은 말로만 “열심히 일하십시오.” 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먼저 일했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수고했습니다.
그리고 그 노동을 통해 복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7~9절에서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는 바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바울은 자신이 가르치는 것을 먼저 살았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놀라운 특징입니다.
복음은 강단에서만 선포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직장에서도 선포됩니다.
말로 전하는 복음도 중요하지만, 복음을 살아내는 삶도 복음의 증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5장 16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4. 바울은 왜 자신의 권리를 포기했는가? 복음에 장애가 생기지 않도록 자신의 권리를 절제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은 바울의 직업관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본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서 교회의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분명히 압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 12절: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핵심입니다. 바울은 일을 사랑해서 일한 것이 아닙니다. 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일한 것만도 아닙니다.
그는 복음에 장애가 생기지 않도록 자신의 권리를 절제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15절에서 자신의 태도를 더욱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그리고 16절에서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바울에게 복음은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사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권리보다 복음의 유익을 앞세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복음을 위해 내가 가진 권리까지 내려놓을 수 있는 자유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도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5. 바울은 일을 통해 "일, 책임, 복음의 증언" 자립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1~12절에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에게도 거리낌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는 세 가지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일, 책임, 복음의 증언. 일하는 삶이 외부 사람들에게 복음의 신뢰성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잠언 14장 2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어도 입술의 말은 궁핍을 이룰 뿐이니라.”
잠언 12장 11절도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거니와 방탕한 것을 따르는 자는 지혜가 없느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서 바울은 매우 강한 원칙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그리고 12절에서는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고 권면합니다.
바울에게 노동은 영성의 반대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책임 있는 노동은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드러내는 방식이었습니다.
성경은 게으름을 영적인 것으로 포장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성경은 노동을 우상화하지도 않습니다. 이 두 극단을 모두 거부합니다.
6. 일하지 않는 것과 일의 우상화는 둘 다 복음에서 벗어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두 가지 극단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일은 먹고살기 위한 필요악이다.”
두 번째는 “일에서 성공해야 내 존재 가치가 증명된다.”
둘 다 문제입니다. 일을 하찮게 생각하면 게으름에 빠집니다. 일을 절대화하면 우상숭배에 빠집니다.
성경은 이 둘 사이에서 새로운 길을 제시합니다.
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지만 하나님 그 자체는 아닙니다.
돈도 선물이지만 하나님이 아닙니다. 직업도 소명이지만 정체성 전체가 아닙니다. 성공도 감사할 일이지만 구원은 아닙니다.
시편 127편 1~2절은 우리에게 중요한 균형을 가르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왜 그렇습니까? 노동보다 하나님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잠언 16장 3절도 말씀합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나는 내 직업으로 구원받는 사람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내 직업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다.” 이 차이는 엄청납니다.
7. 창세기에서 일은 타락 이전부터 존재했습니다
기독교의 직업관은 바울에게서 갑자기 시작되지 않습니다. 성경의 시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창세기 2장 15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아담은 타락하기 전부터 일했습니다. 따라서 일 자체가 저주는 아닙니다. 저주는 타락 이후 일에 들어온 고통과 수고입니다.
창세기 3장 17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그리고 19절은 더욱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그러므로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일은 창조의 선물이고, 일의 고통은 타락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일의 본래 목적을 다시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로마서 8장 19~21절은 피조세계 전체가 회복을 기다리고 있음을 말씀합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께서 회복하시는 창조세계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8. 예수님도 노동의 세계를 아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이전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마가복음 6장 3절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렇게 부릅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예수님은 인간의 노동 세계를 아셨습니다.
나무를 만지는 손을 아셨습니다. 땀을 아셨습니다. 육체의 피곤함을 아셨습니다. 노동의 가치와 노동의 고통을 아셨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직업관에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으셨을 뿐 아니라 인간의 일상과 노동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이것이 성육신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일터를 하나님이 없는 세속 공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직장에도 계십니다.
사무실에도 계십니다.
공장에도 계십니다.
학교에도 계십니다.
병원에도 계십니다.
연구실에도 계십니다.
가게에도 계십니다.
책상 앞에도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물으십니다. “그 자리에서 너는 나를 어떻게 섬기고 있느냐?”
9. 바울의 천막 만들기는 성육신적 선교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함께 일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3절입니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여기에는 선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은 높은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내려가 명령하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과 함께 일했습니다. 그들의 땀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의 삶의 리듬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의 노동 세계 안에 복음을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빌립보서 2장 5~8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적 자기비움의 원리를 발견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바울의 선교도 이러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반영합니다.
복음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갑니다. 복음은 사람들에게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살아내는 것입니다.
10. 그래서 직장은 선교지가 됩니다
우리는 흔히 선교지를 해외로 생각합니다.
태국에 가야 선교이고, 아프리카에 가야 선교이고, 미전도 종족에게 가야 선교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은 귀한 선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선교를 더 넓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13~16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빛은 어둠 속에서 빛나야 합니다. 소금은 세상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직장인은 직장에서 선교사입니다.
교사는 학교에서 선교사입니다.
의사는 병원에서 선교사입니다.
사업가는 사업 현장에서 선교사입니다.
공무원은 행정 현장에서 선교사입니다.
연구자는 연구실에서 선교사입니다.
가정주부도 가정에서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사람입니다.
학생도 공부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소명은 목회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모든 성도를 향해 말씀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11. 루터와 칼빈이 회복시킨 중요한 진리
종교개혁은 직업의 신학에도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중세 사회에서는 성직과 세속적 노동 사이에 지나치게 높은 가치 차이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서 부르심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루터에게 소명은 수도원이나 성직자에게만 제한되지 않았습니다.
일상의 삶도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로 이해되었습니다. 칼빈 역시 직업을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는 자리로 이해했습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각 사람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리에서 자신의 소명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천하고 하찮아 보이는 일이라도 가치가 없는 일이 아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8절은 이 원리를 교회 공동체에 대해 말하면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서로 다른 역할을 주셨습니다. 로마서 12장 6절도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세상의 평가로 직업의 가치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연봉이 높으면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으면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면 성공한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묻습니다. “그 직업이 하나님 앞에서 누구를 섬기고 있는가?” 이 질문이 더 중요합니다.
12. 직업의 크기가 아니라 충성의 크기가 중요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에서는 직업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충성의 크기가 중요합니다.
작은 일을 맡았지만 충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의 자리에서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는 귀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에서 “얼마나 많이 벌었느냐”보다 “착하고 충성된 종”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 21절: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누가복음 16장 10절도 말씀합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하나님은 우리의 직함보다 충성을 보십니다. 직급보다 충성을 보십니다. 연봉보다 충성을 보십니다. 사람들의 박수보다 충성을 보십니다.
13. 그런데 바울의 직업관에는 한 가지 더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탁월함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대충 일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이 이웃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3장 23절은 다시 한번 우리의 기준을 분명하게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잠언 22장 29절도 말씀합니다.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전도서 9장 10절도 매우 직접적으로 말씀합니다.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그리스도인의 탁월함은 경쟁자를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충실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내가 만드는 제품을 누군가 사용합니다.
내가 작성한 문서를 누군가 판단의 근거로 사용합니다.
내가 가르친 학생이 사회로 나갑니다.
내가 치료한 환자의 삶이 달라집니다.
내가 만든 시스템을 사람들이 사용합니다.
내가 내린 결정이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므로 직업의 탁월함은 단순한 자기계발이 아닙니다. 이웃 사랑입니다.
14. 탁월함은 교만이 아니라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균형이 있습니다.
성경적 탁월함은 “내가 최고가 되어야 한다.” 는 경쟁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더 잘해서 다른 사람을 더 잘 섬기겠다.” 는 마음입니다.
탁월함의 목적이 자기 영광이면 우상이 됩니다. 그러나 탁월함의 목적이 이웃 사랑이면 섬김이 됩니다.
빌립보서 2장 3~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자기 분야에서 공부해야 합니다. 연구해야 합니다. 배워야 합니다. 실력을 길러야 합니다.
새로운 기술을 익혀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이 일을 더 잘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십시오. 제가 더 잘함으로 누군가의 삶이 더 좋아지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기독교적 전문성입니다.
15. 일은 우리를 훈련하는 하나님의 학교입니다
일터는 단지 돈을 버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하시는 학교이기도 합니다.
일을 통해 우리는 인내를 배웁니다.
야고보서 1장 2~4절은 시험과 인내를 통해 성숙해지는 과정을 말씀합니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생각해 보십시오.
직장에서 우리는 인내를 배웁니다.
용서를 배웁니다.
협력을 배웁니다.
정직을 배웁니다.
절제를 배웁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는 법을 배웁니다. 갈등을 해결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래서 일터는 영성의 시험장입니다.
교회에서는 온유한데 직장에서는 화를 냅니까?
교회에서는 정직한데 회사에서는 거짓말합니까?
교회에서는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직장에서는 사람을 이용합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아직 일터까지 내려오지 않은 것입니다.
16. 진짜 신앙은 월요일 아침이 되면 직장에서 드러납니다
사람은 예배당에서 얼마든지 거룩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월요일 아침이 되면 진짜 모습이 드러납니다.
상사가 나를 인정하지 않을 때,
동료가 나를 무시할 때,
성과를 다른 사람이 가져갈 때,
내가 승진에서 탈락했을 때,
부당한 평가를 받을 때,
내가 손해를 볼 때, 그때 나는 무엇을 선택합니까? 복음은 바로 그곳에서 시험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의 성령의 열매가 진짜로 필요한 곳도 바로 그곳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열매는 교회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직장에서도 필요합니다.
특히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순간, 그때 성령의 열매가 우리의 신앙을 증명합니다. 그래서 일터의 영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직장생활은 신앙생활의 부록이 아닙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의 일부입니다.
17. 바울의 일은 자기 과시가 아니라 복음을 위한 자기 비움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위해 권리를 내려놓았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19절에서 그는 말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여기서 바울의 노동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유인이었지만 종처럼 섬겼습니다.
사도였지만 노동자가 되었습니다. 지식인이었지만 사람들과 함께 땀을 흘렸습니다.
권리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복음을 위해 권리를 절제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방식입니다.
자기 권리를 최대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것.
바울의 직업관은 결국 십자가의 신학과 연결됩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바울은 이 그리스도의 삶을 자신의 사역 속에서 구현했습니다.
18. 그러므로 직장은 나의 성공을 위한 무대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자리입니다
여러분의 직장을 다시 바라보십시오.
그곳을 단순히 “월급 받는 곳” 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곳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보내신 자리일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그곳에서 정직하십시오.
그곳에서 탁월하십시오.
그곳에서 사람을 살리십시오.
그곳에서 약한 사람을 보호하십시오.
그곳에서 후배를 세워주십시오.
그곳에서 경쟁자에게도 정직하십시오.
그곳에서 힘 있는 사람에게만 잘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닮으십시오.
미가 6장 8절의 말씀처럼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이것이 일하는 전도자의 삶입니다.
19. 바울의 직업관을 오늘 우리의 직장에 적용한다면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나는 먹고살기 위해서만 일하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세상을 섬기기 위해 일합니다.
에베소서 4장 28절처럼,
내가 일해서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 17~19절은 물질을 가진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나누라고 권면합니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그러므로 우리의 소득도 하나님 나라를 위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 나는 내 직업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무엇을 하든지.” 여기에는 직업도 들어갑니다.
회의도 들어갑니다.
보고서도 들어갑니다.
연구도 들어갑니다.
사업도 들어갑니다.
고객을 만나는 것도 들어갑니다.
청소도 들어갑니다.
운전도 들어갑니다.
아이를 돌보는 것도 들어갑니다.
셋째, 나는 나의 일을 탁월하게 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23절처럼 “주께 하듯” 일해야 합니다. 대충 하지 마십시오. 부정확하게 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서 “나는 기독교인이니까 괜찮다.” 고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더 정직하고 더 정확하고 더 책임감 있게 일해야 합니다.
디도서 2장 7~8절도 성도들에게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라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업무 태도 자체가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넷째, 나는 일을 통해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
직업의 궁극적 가치를 연봉만으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얼마나 살리는가를 보십시오.
사회에 어떤 유익을 주는가를 보십시오.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2장 39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이웃 사랑은 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직업을 통해서도 실천됩니다. 이것이 성경적 직업관입니다.
20. 일의 신학은 창조–타락–구속–회복의 이야기입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 일은 창조–타락–구속–회복 이라는 큰 이야기 안에 놓여 있습니다.
창조: 하나님은 인간에게 일할 능력과 사명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
“땅을 다스리라.”
타락: 죄 때문에 일이 고통과 경쟁, 착취와 우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 17~19절:
“너는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구속: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일의 본래 목적을 다시 발견합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회복: 우리의 일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선함과 정의와 아름다움을 세상 가운데 드러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5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직장을 떠나 세상을 버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21. 그렇다면 직업을 선택할 때 무엇을 물어야 합니까?
세상은 묻습니다. “연봉이 얼마입니까?” “복지가 좋습니까?” “승진이 빠릅니까?” “사람들이 알아줍니까?” 물론 이런 질문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한 단계 더 깊은 질문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직업을 통해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가?” 그리고 질문해야 합니다.
“이 일을 통해 누구를 섬길 수 있는가?”
“이 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방해가 되는가?”
“내가 이 직업을 통해 정직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
“내 가족과 공동체를 책임 있게 섬길 수 있는가?”
“내가 가진 은사와 능력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가?”
“이 일을 통해 다른 사람의 삶에 어떤 유익을 줄 수 있는가?”
고린도전서 7장 17절은 각 사람이 주께서 나누어 주신 자리에서 살아가도록 권면합니다.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진로 결정입니다.
22. 직업이 나의 정체성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복음의 원리가 있습니다. 직업은 소명이지만 정체성은 아닙니다.
나는 의사가 아닙니다.
나는 먼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교수이기 전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회사원이기 전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사업가이기 전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목회자이기 전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직업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역할이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은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갈라디아서 2장 20절도 우리의 궁극적 정체성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래서 직업을 잃어도 내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습니다. 승진하지 못해도 내가 무가치한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나를 아십니다. 이것이 복음이 주는 자유입니다.
23. 가장 위대한 일은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삶을 보십시오. 그는 자신의 직업을 통해 돈만 번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일하면서 사람을 만났습니다. 사람을 만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공동체를 세우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했습니다.
그의 천막 만드는 일이 복음의 경쟁자가 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한 통로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여러분의 직업도 복음의 경쟁자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직업이 오히려 복음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0절은 말씀합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여러분의 직업적 은사도 하나님의 은혜를 섬기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24. “월요일의 선교사”가 되십시오
주일에만 그리스도인이 되지 마십시오.
월요일에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화요일에도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회의할 때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보고서를 작성할 때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고객을 만날 때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상사와 대화할 때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후배를 대할 때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갈등을 해결할 때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돈을 사용할 때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그리고 그 모든 자리에서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 오늘 제가 하는 일을 통해 누군가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16절에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것이 일하는 전도자의 기도입니다.
25. 바울의 마지막 증언
바울은 마지막까지 자신이 맡은 사명을 다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7절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그리고 8절에서 말합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바울에게 인생의 마지막 평가는 연봉이 아니었습니다. 명예도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평가도 아니었습니다.
“믿음을 지켰는가?” 였습니다. 우리도 언젠가 인생을 마치게 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우리의 직함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은행 잔고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승진 기록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박수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했던 삶, 사람을 사랑했던 삶, 맡겨진 자리에서 충성했던 삶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은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그리스도인의 노동에는 영원한 의미가 있습니다.
결론 — 당신의 일터가 하나님 나라의 현장이 되게 하십시오
오늘 우리는 바울에게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배웠습니다. 바울은 일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에게 노동은 선교의 방해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노동은 선교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일했습니다. 자신의 필요를 책임졌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수고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 일했습니다. 복음의 장애가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일하는 삶을 통해 성도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직업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여러분의 직업은 단순히 월급을 받는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보내신 자리입니다.
여러분의 직장은 단순히 생존의 장소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드러낼 수 있는 선교의 자리입니다.
여러분의 일은 단순한 노동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일을 하되 돈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성공하되 성공을 하나님보다 사랑하지 마십시오.
탁월하되 교만하지 마십시오.
열심히 일하되 일을 우상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돈을 벌되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지 마십시오.
실력을 키우되 자기 영광을 위해 사용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있는 그 자리에서 이렇게 살아가십시오.
“나는 오늘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교사다.”
회사에서,
학교에서,
병원에서,
공장에서,
연구실에서,
가정에서,
시장과 거리에서,
내가 있는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사람으로 살아가십시오.
오늘의 다섯 가지 선언
첫째, 나는 일하기 위해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일한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 에베소서 2:10
둘째,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만 일하지 않고 이웃을 섬기기 위해 일한다.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 에베소서 4:28
셋째, 나는 주께 하듯 내 일을 탁월하게 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 골로새서 3:23
넷째, 나는 내 직업을 우상으로 만들지 않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 고린도전서 10:31
다섯째, 나는 내가 있는 일터에서 복음을 말로만 전하지 않고 삶으로 보여주는 일하는 전도자가 된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 마태복음 5:16
바울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의 인생이 끝나는 날, 우리도 주님 앞에서 이런 음성을 듣기를 소망합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우리의 직업이 크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하나님께 충성했기 때문입니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에게 일할 수 있는 손과 생각할 수 있는 지혜와 사람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일을 단순히 돈을 버는 수단으로만 생각하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일이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창세기에서 인간에게 일을 맡기셨던 하나님,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노동도 주님의 뜻 안에서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사도 바울처럼 우리의 손으로 수고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게 하시며,
우리의 수고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가 일터에서 대충하지 않게 하시고, 주께 하듯 마음을 다하여 일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전문성을 주시고, 탁월함을 주시고, 그러나 그 탁월함 때문에 교만해지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의 능력이 다른 사람을 누르는 무기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의 직업이 우리의 우상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돈이 우리의 주인이 되지 않게 하시고, 명예가 우리의 주인이 되지 않게 하시며, 승진과 성공이 우리의 정체성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의 가장 깊은 정체성이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라는 사실에 있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의 직장을 변화시켜 주옵소서.
우리가 있는 곳에 정직이 살아나게 하시고,
우리가 있는 곳에 배려가 살아나게 하시고,
우리가 있는 곳에 정의가 살아나게 하시고,
우리가 있는 곳에 용서가 살아나게 하시고,
우리가 있는 곳에 소망이 살아나게 하옵소서.
우리 때문에 직장의 분위기가 조금 더 좋아지게 하시고,
우리 때문에 약한 사람이 보호받게 하시며, 우리 때문에 낙심한 사람이 다시 일어나게 하시고,
우리 때문에 누군가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조금이라도 경험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를 월요일의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교회에서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일터에서도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고, 예배당에서만 거룩한 사람이 아니라
회의실에서도, 책상 앞에서도, 현장에서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게 하옵소서.
고린도후서 2장 15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우리의 일터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게 하옵소서.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말과 삶으로 복음을 증거하게 하시고, 우리의 일과 우리의 수고와 우리의 손길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조금씩 드러나게 하옵소서.
마지막 날,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직업과 우리의 모든 수고를 돌아보실 때 “너는 얼마나 높은 자리에 있었느냐”
가 아니라 “너는 얼마나 충성했느냐” 라는 질문 앞에 부끄럽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의 모든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우리의 모든 수고를 통하여 사람들이 유익을 얻으며,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임 받게 하옵소서.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라” 는 말씀을 붙들고, 오늘도 우리의 자리에서 충성하게 하옵소서.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우리의 일터를 선교지로,
우리의 직업을 소명으로,
우리의 노동을 사랑의 섬김으로,
우리의 전문성을 하나님 나라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월요일을 예배가 되게 하시고,
우리의 직장을 선교지가 되게 하시며,
우리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사가 되게 하옵소서.
로마서 12장 1절의 말씀처럼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오늘 우리의 삶 전체를 주님께 드립니다.
우리의 손을 드립니다.
우리의 머리를 드립니다.
우리의 전문성을 드립니다.
우리의 직업을 드립니다.
우리의 시간과 재정을 드립니다.
우리의 직장을 드립니다.
우리의 모든 수고를 드립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주님, 제가 있는 이곳을 하나님 나라의 자리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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