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열심, 사망의 땅 '호남', 불모지에 심은 복음!
나주의 실패, 목포 선교부의 탄생
프롤로그
유교 문화가 깊게 뿌리내려, 토착 신앙과 무속이 지배하던 영적 어두움의 도시 호남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16:9)
역사를 공부할수록 우리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은 계획하지만, 하나님은 섭리하십니다. 사람은 성공과 실패를 말하지만, 하나님은 구속사를 이루십니다.
1884년 겨울, 조선은 아직 복음을 거의 알지 못하는 나라였습니다.
그해 의사 알렌(Horace N. Allen)이 입국하며 근대 의료선교의 문이 열렸고, 이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조선 땅을 밟았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교회를 세우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육을 세우고, 병원을 세우고, 성경을 번역하며, 한 민족의 미래를 준비하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선교의 중심은 서울과 평양이었습니다.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만큼 부흥의 중심지가 되었고, 서울은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반면 호남은 달랐습니다. 넓은 곡창지대였지만 유교 문화가 깊게 뿌리내린 지역이었고, 토착 신앙과 무속의 영향도 강했습니다.
외국인에 대한 경계심 또한 매우 컸습니다. 그럼에도 미국 남장로교는 기도 끝에 결단합니다.
"호남에도 반드시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 이 결단은 단순한 선교 전략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첫걸음이었습니다.
제1장. 하나님은 왜 호남을 선택하셨는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사도행전 1:8)
복음은 언제나 중심에서 변두리로, 다시 변두리에서 땅끝으로 확장되었습니다.
호남은 당시 조선의 '땅끝'과 같은 지역이었습니다. 전라도 서남해에는 수많은 섬이 흩어져 있었고, 교통은 불편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곳을 선교의 전략적 거점으로 삼으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늘 그러셨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들판에서 왕으로 선택되었습니다.
갈릴리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무시하던 변방이었지만, 예수님은 그곳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인간은 중심을 선택하지만, 하나님은 사명의 중심을 선택하십니다. 호남도 그러했습니다.
제2장. 왜 나주에서 선교스테이션은 실패하게 되었는가?
19세기 말 나주는 호남의 행정 중심지였습니다.
조선 시대 전라감영의 영향 아래 정치와 행정, 상업과 교육이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자연스럽게 나주를 호남선교의 본거지로 구상했습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나주는 강한 성리학 전통과 양반 중심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외국인 선교사에 대한 경계는 매우 강했고, 복음은 쉽게 뿌리내리지 못했습니다.
선교사들의 초기 계획은 예상보다 큰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정말 나주 선교는 실패였을까요?
성경은 말합니다.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르니라." (이사야 55:8-9)
하나님의 역사에서는 실패처럼 보이는 사건도 더 큰 계획을 위한 전환점이 될 수 있습니다.
제3장. 하나님은 문을 닫으심으로 더 큰 문을 여신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막으셨습니다.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사도행전 16:7)
사람의 눈에는 실패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게도냐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 결과 복음은 유럽으로 건너갔고, 세계 선교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나주에서 목포로의 이동 역시 이와 닮아 있습니다.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계획이 무너졌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항구 도시 목포를 통해 서남해와 도서 지역, 그리고 광주와 순천까지 이어질 거대한 복음의 길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1894년 4월 18일, 레이놀즈 선교사가 목포를 정탐한 날은 단순한 답사가 아니었습니다.
이 날짜는 호남 복음화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평가됩니다.
그날, 하나님은 한 도시가 아니라 한 지역 전체를 향한 선교의 문을 여셨습니다.
목포는 작은 항구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의 시선에서는 호남 선교의 관문이었습니다.
사람은 나주를 선택했지만, 하나님은 목포를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이후 130년 동안 호남 교회의 역사와 한국 근대 교육, 의료, 민족운동에 깊은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제4장. 하나님은 왜 목포를 선택하셨는가?
1. 바다를 향한 하나님의 선교 전략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누가복음 5:4)
역사는 우연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목적을 향해 움직입니다. 1894년. 조선은 거대한 격변 속에 있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고,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을 둘러싸고 충돌하면서 청일전쟁이 발발합니다.
조선 사회는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정치의 격변 뒤에서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길을 준비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2. 개항은 일본의 전략이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선교의 길로 바꾸셨다
1897년 10월. 목포가 부산과 인천에 이어 개항합니다. 일본은 호남평야의 쌀을 실어가기 위해 목포를 개발했습니다.
그들에게 목포는 수탈의 항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같은 항구를 복음의 항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그렇습니다.
애굽은 노예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의 가족을 그곳에서 민족으로 성장시키셨습니다.
바벨론은 포로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곳에서 다니엘을 세우셨습니다.
로마는 십자가를 만든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로마의 도로를 이용하여 복음을 유럽 전체로 퍼뜨리셨습니다.
목포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은 항구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교의 관문을 만드셨습니다.
3. 레이놀즈는 항구를 보았지만 하나님은 서남해를 보고 계셨다
1894년 4월 18일. 윌리엄 레이놀즈는 목포를 정탐합니다.
겉으로 보면 작은 어촌. 인구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초기 조선인은 약 300명, 30여 호에 불과했고,
일본인은 오히려 천 명가량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선교할 가치가 없어 보이는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혀 다른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목포 앞바다. 신안. 압해. 암태. 자은. 비금. 도초. 흑산. 홍도. 진도. 완도. 수백 개의 섬들이 목포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만약 나주가 선교기지가 되었다면 이 섬들은 복음에서 훨씬 더 멀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포는 복음이 바다를 건너는 출발점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시선입니다.
4. 하나님은 도시 하나가 아니라 선교 네트워크를 설계하셨다
선교학에서 Mission Station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선교기지는 한 도시만 복음화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교회가 세워지고 학교가 세워지고 병원이 세워지고 지도자가 양성되고 다시 수십 개의 지역으로
복음이 퍼져 나갑니다.
목포는 바로 그런 도시였습니다. 선교사들은 목포를 중심으로 광주, 순천, 나주, 영암, 강진, 해남, 신안, 진도, 완도까지
복음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오늘날 호남 교회의 뿌리를 따라 올라가면 놀랍게도 목포를 만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제5장. 복음사역의 세 가지 선교전략 플랫폼을 세우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한복음 10:10)
예수님의 복음은 영혼만이 아니라 사람 전체를 살리는 복음입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 가지를 선교전략을 세웠습니다.
첫째는 병원. 둘째는 학교. 셋째는 교회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역 자체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고, 병든 자를 고치셨으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마태복음 4:23)
목포 선교사들은 예수님의 방법을 그대로 따랐으로 오늘날 모든 선교단체의 공통적인 선교전략으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1. 첫 번째 기둥
양동교회
1898년. 목포 최초의 교회가 세워집니다. 양동교회. 그러나 이것은 교회 하나가 생긴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호남선교의 모교회가 태어난 순간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교회를 지을 때 지역 주민들이 직접 산에서 돌을 캐고 손으로 다듬어 운반했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외국인이 만든 건물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의 손으로 세워졌습니다.
이것이 성육신적 선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신 것처럼 선교사들도 백성과 함께 살아갔습니다.
양동교회는 왜 특별한가?
1919년. 3·1운동. 목포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태극기를 만들던 장소. 독립선언서를 숨기던 장소.
종탑의 종소리로 만세운동의 시작을 알렸던 장소. 바로 양동교회였습니다.
복음은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민족을 살리는 힘이었습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면서도 동시에 이 땅의 정의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호남선교가 남긴 위대한 유산입니다.
교회는 예배당이 아니라 한 시대를 변화시키는 씨앗이었다
오늘 우리는 교회를 건물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에게 교회는 한 도시를 변화시키는 심장이었습니다.
양동교회에서 시작된 복음은 수많은 조사와 전도인을 세웠고, 그들은 다시 호남 곳곳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24)
목포는 바로 그 한 알의 밀알이었습니다. 그리고 130년이 지난 오늘, 우리가 호남 곳곳에서 만나는 수많은 교회는
그 한 알의 씨앗이 맺은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목포는 단순한 선교기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호남 복음화를 위해 심으신 '복음의 씨앗'이었습니다.
제6장. 복음은 학교를 세우고, 한 시대를 깨웠다
1. 한 시대를 깨울 씨앗, 정명여학교와 영흥학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호세아 4:6)
19세기 말 조선 사회에서 여성은 배움의 기회를 거의 갖지 못했습니다.
유교 사회는 여성의 역할을 가정 안으로 제한했고, 글을 배우는 것조차 사치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복음과 함께 교육을 보내셨습니다. 복음은 단순히 죄 사함만을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목포에 도착하자마자 교회만 세우지 않았습니다.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복음은 더 깊이 뿌리내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 역시 성경 번역과 교육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교육은 선교의 도구가 아니라 복음 자체를 전달하는 통로였습니다.
2. 정명여학교, 한 소녀를 살린 것이 아니라 한 민족의 미래를 세우다
1903년, 목포에 정명여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초기 여성 사역자들의 헌신과 유진 벨의 복귀 이후 학교 사역이 본격화되며
여성 교육의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당시 선교사들은 단순히 글을 가르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찬송을 가르쳤습니다. 위생을 가르쳤습니다. 인간의 존엄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너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라는 진리를 가르쳤습니다.
이 한 문장은 당시 조선 여성들에게 혁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셨고(요한복음 4장),
마리아를 제자로 받아들이셨으며(누가복음 10:39), 부활의 첫 증인으로 여인들을 세우셨습니다(요한복음 20장).
목포의 여성 교육은 이러한 복음의 정신을 한국 사회 속에서 실천한 사역이었습니다.
3. 정명여학교는 독립운동의 산실이 되었다
교육은 결국 시대를 바꾸었습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목포에서는 3월 21일과 4월 8일 만세운동이 이어졌습니다.
정명여학교 학생들과 양동교회 성도들은 함께 태극기를 제작하고 만세 시위를 준비하며 항일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선교사들이 심은 복음은 학생들의 가슴속에서 나라를 사랑하는 신앙으로 자라났습니다.
진리는 사람을 자유롭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32)
복음은 영혼만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받는 시대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일깨우는 힘이었습니다.
4. 영흥학교, 복음은 지도자를 세우다
같은 해, 영흥학교도 문을 열었습니다. 영흥학교는 단순한 근대식 학교가 아니었습니다.
성경을 중심으로 학문과 인격을 함께 세우는 교육 공동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세우셨듯, 선교사들은 미래의 한국 교회와 사회를 이끌 지도자를 길러내고자 했습니다.
한 사람을 세우는 일이 곧 한 시대를 세우는 일이라는 믿음이 그들의 교육 철학이었습니다.
제7장. 병원사역의 시작, 복음은 몸과 영혼을 함께 치유하다.
1. 복음은 몸과 영혼을 함께 치유한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태복음 9:35)
예수님의 사역에는 언제나 치유가 함께했습니다. 그래서 초기 선교사들도 의료선교를 복음 사역의 핵심으로 여겼습니다.
목포에는 프렌치 메모리얼 병원이 세워졌습니다. 이 병원은 미국 프렌치의 후원과 교회 성도들의 헌금으로 1916년 완공되었으며, 지역 의료와 선교를 함께 감당했습니다.
2. 복어국 사건, 사랑은 사람들의 마음을 열었다
초기 목포 선교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언어는 달랐고, 문화는 낯설었으며, 외국인에 대한 경계심은 매우 컸습니다. 그러나 의료선교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었습니다.
특히 선교 자료에 전해지는 '복어국 사건' 이후 목포 진료소를 찾는 환자들이 크게 늘어나면서, 병원은 복음을 전하는 신뢰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병을 고치기 위해 왔지만, 선교사들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사랑은 말보다 강했습니다. 야고보는 말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서 2:17)
목포의 의료선교는 바로 살아 있는 믿음의 증거였습니다.
제8장. 호남선교의 아버지, 유진 벨의 눈물 복음화의 꽃을 피우다
호남선교를 이야기하면서 유진 벨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수많은 마을을 걸어서 방문했고, 교회를 세우고, 조사들을 훈련하며, 목포와 광주를 연결하는 선교망을 구축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성공담만으로 채워져 있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로티를 잃는 깊은 슬픔을 겪었고, 건강 악화와 사역의 어려움 속에서도 복음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7)
선교사들은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연약한 질그릇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질그릇 안에 담긴 복음은 호남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었습니다.
제9장. 바다를 건너간 복음, 목포에서 시작된 95개 섬의 기적
"바다는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시편 95:5)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사도행전 1:8)
1. 하나님은 왜 항구를 선교기지로 선택하셨는가?
한국교회사 130년을 연구하다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서울은 정치의 중심이었습니다. 평양은 부흥의 중심이었습니다. 부산은 일본으로 향하는 관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목포는 달랐습니다. 목포는 **'땅끝으로 가는 복음의 항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목포를 하나의 도시를 위한 선교기지가 아니라, 서남해 전체를 복음화하기 위한 전진기지(Mission Forward Base)로 준비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목포를 작은 항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수백 개의 섬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2. 수탈의 항구 목포를 복음화의 관문으로 바꾸신 하나님의 섭리
로마는 정복을 위해 길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길을 복음의 길로 바꾸셨습니다.
바울은 로마가 만든 도로를 따라 에베소로, 빌립보로, 고린도로, 로마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목포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은 수탈을 위해 항구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항구를 생명의 항구로 바꾸셨습니다.
쌀이 나가던 배에 복음이 함께 실려 갔습니다. 사람을 착취하던 항로가 영혼을 살리는 항로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설입니다. 요셉을 노예로 팔아넘긴 길이 이스라엘을 살리는 길이 되었던 것처럼
목포항 역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호남 복음화의 관문이 되었습니다.
3. 맥컬리 선교사, 이름 없는 섬을 향한 하나님의 사람
목포 선교를 이야기하면서 맥컬리(McCurley, 한국명 맹현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목포에서만 사역한 선교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바다를 건너는 선교사였습니다.
당시 전남 서남해에는 교통수단도, 도로도, 숙소도 거의 없었습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면 배는 며칠씩 뜨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선교 기록에 따르면 그는 약 95개의 섬과 500여 개 마을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고, 교회와 예배처소를 세우는 데 헌신했습니다.
이 사역은 단순한 순회 전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양을 찾아 나선 목자의 발걸음이었습니다.
4. 잃어버린 양을 찾아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마태복음 18:12)
맥컬리 선교사는 바로 그 말씀을 삶으로 살아낸 사람이었습니다.
한 섬을 위해 며칠 동안 배를 탔습니다. 한 사람에게 세례를 주기 위해 거친 파도를 건넜습니다.
한 마을을 위해 진흙길을 걸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동차로 몇 분이면 갈 거리를, 그들은 며칠씩 걸어갔습니다.
왜였을까요? 그들에게는 사람보다 귀한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5. 교회에서 학교로 이어지는 복음
목포 선교는 단순한 교회 개척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교회가 세워지면 학교가 세워졌습니다. 학교가 세워지면 성경을 읽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이 생기면 지도자가 자랐습니다. 지도자가 자라면 새로운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것이 초기 한국 선교의 가장 위대한 전략이었습니다.
제10장. 교회를 심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심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마태복음 13:23)
목포 선교사들은 당장의 성공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씨앗을 심었습니다.
그 씨앗이 양동교회가 되었습니다. 정명여학교가 되었습니다. 영흥학교가 되었습니다. 프렌치메모리얼병원이 되었습니다.
그 씨앗은 광주 선교부가 되었고, 순천 선교부가 되었으며, 해남과 영암, 강진과 신안, 완도, 진도의 수많은 교회로 이어졌습니다.
1. 광주 선교부의 탄생
목포 선교는 선교복음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비로서 더 큰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한 시작이었습니다.
1904년 미국 남장로교는 광주 선교부를 조직합니다. 이 결정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목포에서 이미 선교 기반이 마련되었기 때문입니다.
목포는 항구였고, 광주는 내륙의 중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두 도시를 연결하여 호남 전체를 복음으로 엮으셨습니다.
마치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땅끝으로 확장된 것처럼, 목포에서 시작된 복음은
광주와 순천, 그리고 서남해 도서 지역으로 계속 퍼져 나갔습니다.
2. 생명으로 드린 한 알의 밀알은 호남선교로 열매 맺습니다
초기 선교사들의 삶은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스트레퍼는 질병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사역했습니다.
벨 부인은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오웬 역시 건강 악화로 사역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영웅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연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을 위해 자신의 삶을 기꺼이 내어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24)
호남 선교의 역사는 바로 이 말씀의 역사였습니다.
선교사들의 눈물은 씨앗이 되었고, 그 씨앗은 130년이 지난 오늘 호남 곳곳의 교회와 학교, 병원, 그리고
수많은 신앙 공동체로 자라났습니다.
3. 역사 속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섭리
오늘 우리는 나주의 문이 닫힌 것을 실패로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방향 전환이었습니다. 목포는 단지 대안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래전부터 준비하신 선교의 중심지였습니다.
닫힌 문 하나 뒤에는 더 넓은 바다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도시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섬과 마을, 그리고 다음 세대를 품으시는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목포 선교의 역사는 우리에게 분명한 교훈을 남깁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계획을 멈추게 하시지만, 그 멈춤은 끝이 아니라 더 큰 구속사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삶에도 닫힌 문이 있다면, 그 문 뒤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목포'를 준비하고 계신지 기대하며
믿음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기도문
"호남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을 기억하며"
거룩하시고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는 한 도시의 역사가 아니라, 한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바라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나주의 문이 닫히는 것을 실패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실패를 통해 목포라는 새로운 선교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사람은 눈앞의 현실을 보았지만, 주님은 130년 후의 역사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주님,
우리의 삶에도 나주가 있습니다. 계획했던 일이 무너지고, 기도했던 문이 닫히며,
이해할 수 없는 실패 앞에서 낙심하고 주저앉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목포 선교의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다시 말씀하여 주옵소서.
닫힌 문보다 하나님께서 열어 놓으신 새로운 문을 바라보는 믿음을 주옵소서.
바울의 길을 막으시고 마게도냐를 준비하셨던 하나님, 나주를 지나 목포를 준비하셨던 하나님,
우리 인생의 모든 걸음을 주의 선하신 뜻 가운데 인도하여 주옵소서.
사랑의 하나님, 유진 벨과 레이놀즈, 오웬과 스트레퍼, 마율리와 맥컬리, 그리고 이름 없이 복음을 전했던
수많은 조사와 성도들의 헌신을 기억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젊음을 드렸고, 가정을 드렸으며, 건강을 드렸고, 때로는 사랑하는 가족까지도 주님의 손에 올려드렸습니다.
그들의 눈물은 호남의 교회가 되었고, 그들의 기도는 학교가 되었으며, 그들의 사랑은 병원이 되었고, 그들의 희생은
오늘 한국교회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주님, 우리도 그 믿음의 계보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편안함을 구하는 신앙이 아니라,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 신앙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받기만 원하는 성도가 아니라, 복음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는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130년 전 목포항에 상륙한 복음이 서남해의 수많은 섬으로 흘러갔던 것처럼, 오늘 우리를 통해
가정으로, 교회로, 직장으로, 학교로, 이 민족과 열방 가운데 생명의 복음이 다시 흘러가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도 한 알의 밀알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도, 사람들의 박수를 받지 못하여도, 복음 때문에 기꺼이 심겨지고 복음 때문에 기꺼이 썩어지는
주의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 130년 전 목포를 준비하셨던 것처럼,
오늘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새로운 '목포'를 바라보는 영적인 눈을 열어 주옵소서.
실패 속에서도 섭리를 보게 하시고, 고난 속에서도 은혜를 보게 하시며, 눈물 속에서도 하나님의 열심을 신뢰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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