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 3강] 한 사람 아담으로 죽음이 왔고,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생명이 왔다

knowledgeplatform100 2026. 7. 1. 08:49

 

율법은 구원의 사다리가 아니라 죄를 비추는 거울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여는 '스위치'이지 공로가 아니다

한 사람 아담으로 죽음이 왔고,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생명이 왔다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하나님이 베푸시는 놀라운 은혜 (롬 4:1-25, 5:1-11)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로마서 4:3)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로마서 5:1)

들어가는 말

우리는 왜 자꾸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사람은 본능적으로 '대가를 지불해야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공부해야 성적 얻고, 일해야 월급 받고, 운동해야 건강을 얻습니다. 세상의 모든 시스템은 노력과 보상의 원리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생각합니다.

"더 기도해야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이다."  "더 헌신해야 하나님이 사랑하실 것이다." "더 봉사해야 하나님께 인정받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서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복음을 선포합니다. 복음은 '열심히 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인간의 모든 종교적 공로를 하나씩 무너뜨립니다.

행위도 아닙니다.

할례도 아닙니다.

율법도 아닙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그리고 믿음조차도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손일 뿐입니다. 이것이 종교와 복음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1. 복음은 사람이 하나님께 올라가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려오신 사건이다.

복음을 많은 사람들이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로마서 1:16-17은 말합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복음의 중심은 윤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마틴 루터는 로마서를 연구하다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의였다."

 

이 깨달음이 종교개혁을 시작했습니다. 칼빈 역시 『기독교강요』에서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서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을 소유한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모든 것이 믿는 자에게 전가됩니다.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께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에게 전가됩니다. 이것이 '이중 전가(Double Imputation)'입니다.

고린도후서 5:21은 이를 가장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복음은 인간의 성공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이야기입니다.

2. 인간은 왜 믿음보다 행위를 좋아하는가?

사람은 믿는 것보다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행위는 자신의 공로를 남기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오래 하면 마음이 놓입니다. 봉사를 많이 하면 뿌듯합니다. 금식을 하면 스스로 경건하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믿음은 다릅니다. 믿음은 자기 자랑을 완전히 무너뜨립니다.

에베소서 2:8-9은 선언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존 스토트는 『로마서 강해』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은혜와 공로는 결코 함께 존재할 수 없다. 공로가 들어오는 순간 은혜는 은혜가 아니다."

 

바울이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을 예로 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최고의 신앙인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질문합니다. "아브라함이 무엇으로 의롭게 되었는가?"

창세기 15:6은 대답합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여기에는 어떤 행위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것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의로 인정하셨습니다.

 

여기서 "여기셨다"라는 헬라어 로기조마이(logizomai)는 "회계장부에 계산하다", "전가하다", "계좌에 입금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계좌에는 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영적 계좌에 입금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저 믿음으로 받았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자격이 있어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은혜를 받았습니다.

 

마치 바라바가 십자가에서 풀려난 것처럼 말입니다. 죽어야 할 사람이 살아났습니다.

심판받아야 할 사람이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정확히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영적인 바라바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자리를 대신하셨고 우리는 얼떨결처럼,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안에서 은혜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은혜를 얻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응답입니다.

 

3. 아브라함의 믿음은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한 믿음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로마서 4:3, 창세기 15:6)

 

사도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가장 존경받던 인물인 아브라함을 법정의 증인으로 세웁니다.

유대인들은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구원의 보증처럼 여겼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정반대의 질문을 던집니다.

 

"아브라함은 언제 의롭다 함을 받았는가?" 이 질문은 복음의 본질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질문입니다.

창세기의 흐름을 보면 하나님은 먼저 아브라함에게 별과 같이 많은 자손을 약속하셨습니다(창세기 15장).

그때까지 아브라함에게는 약속의 아들이 없었습니다.

 

현실은 하나님의 약속과 정반대였습니다. 나이는 많았습니다. 사라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었습니다.

상속자는 종 엘리에셀뿐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모든 가능성이 끝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밤하늘의 별을 보여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세기 15:5)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복음의 핵심 선언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세기 15:6)

 

여기에는 어떤 종교적 업적도 없습니다. 금식도 없습니다. 제사도 없습니다. 율법도 없습니다. 할례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만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 4장에서 반복해서 강조하는 핵심입니다.

4. 할례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표지였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두 번째 자랑을 무너뜨립니다. 그것이 바로 할례입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절대적인 증표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시간 순서를 묻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창세기 15장입니다.

할례를 받은 것은 창세기 17장입니다. 무려 상당한 시간 차이가 있습니다.

 

즉, 의롭다 하심이 먼저이고 할례는 나중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는 구원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구원을 보여 주는 표지였습니다.

바울은 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로마서 4:11)

 

오늘날로 말하면 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그 믿음을 공동체 앞에서 고백하는 표징이 세례입니다.

 

교회 출석도 마찬가지입니다. 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것은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입니다. 토마스 슈라이너는 로마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믿음은 구원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빈손이다."

 

이 말은 종교개혁의 정신과도 정확히 일치합니다. 루터는 믿음을 "거지가 손을 내미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거지가 손을 내민다고 음식의 공로가 거지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음식은 주는 사람의 은혜입니다.

손은 단지 받는 통로일 뿐입니다. 믿음도 그렇습니다. 믿음 자체가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입니다. 믿음은 그 구원을 받아들이는 통로입니다.

5. 율법은 구원의 사다리가 아니라 죄를 비추는 거울이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역사적 사실을 제시합니다.

아브라함은 모세보다 약 400년 이상 앞선 시대의 사람입니다. 모세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브라함은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구원의 조건일 수 없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로마서 4:16)

 

율법은 죄를 드러냅니다. 복음은 죄인을 살립니다.

율법은 병을 진단하는 의사입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시는 참된 의사이십니다.

율법은 우리의 무능을 보여 줍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줍니다.

 

더글러스 무는 로마서 주석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율법은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 능력이 아니라 사람에게 자신이 의롭지 못함을 깨닫게 하는 기능을 가진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24은 율법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초등교사"라고 말합니다.

율법은 예수님께 우리를 데려가는 역할을 합니다. 율법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목적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6.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여는 '스위치'이지 공로가 아니다

믿음을 이해하는 좋은 비유 중 하나는 '믿음의 스위치'라는 비유입니다.

이 표현은 매우 목회적이며 로마서의 핵심을 쉽게 설명해 줍니다.

 

물론 신학적으로 정확하게 말하면 믿음이 은혜를 발생시키는 원인은 아닙니다.

은혜는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수단(means) 입니다. 개혁신학은 이것을 '은혜의 방편'이라고 설명합니다.

스위치가 전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전기는 이미 발전소에서 공급되고 있습니다.

 

스위치는 그 전기를 연결하는 역할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구원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이미 십자가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외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30)

 

믿음은 이미 완성된 구원을 받아들이는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믿음마저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2:8은 말합니다.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가 자랑할 것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를 끝까지 붙드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인은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갈라디아서 6:14)

 

이것이 로마서 4장이 선포하는 복음입니다. 인간의 행위는 침묵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이 노래됩니다.

인간의 공로는 사라지고, 그리스도의 의만이 영광을 받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결코 "내가 해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셨다"는 찬양이 됩니다.

이것이 복음이며, 이것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삶의 중심입니다.

 

7. 칭의는 단순히 죄를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사건이다 (죄책감에서 평안으로,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본문 : 로마서 5:1-1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로마서 5:1)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칭의를 단순히 "죄 사함" 정도로만 이해합니다.

그러나 로마서 5장은 훨씬 더 놀라운 복음을 선포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로마서 4장의 결론을 이어갑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여기서 '화평'(εἰρήνη, eirēnē)은 단순한 심리적 안정이나 마음의 위안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객관적인 관계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과 원수였습니다. 로마서 5:10은 분명히 말합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인간의 가장 큰 비극은 경제적인 가난이 아닙니다. 질병도 아닙니다. 죽음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 상태입니다. 죄는 단순히 법을 어긴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린 반역입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인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은 죄를 범한 뒤 하나님을 피해 숨었습니다.

죄는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게 만듭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를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이 동시에 만나는 자리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는 만족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은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정죄받는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8.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은 자기 자신과도 화평하게 된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과거의 실패가 자신을 붙잡고, 실수했던 기억이 자신을 괴롭히고, 죄책감이 영혼을 짓누릅니다.

심지어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성도들 가운데도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셨을지 모르지만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용서는 우리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언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참소합니다. 요한계시록 12:10은 사탄을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라고 부릅니다.

사탄은 이렇게 속삭입니다. "너는 아직도 부족하다." "너는 또 실패했다." "너 같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냐?"

그러나 성령께서는 전혀 다른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8:1)

 

'결코'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문에서 가장 강한 부정 표현입니다. 

조금도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영원히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이미 무죄 선언을 받았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로마서 강해』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보시는가보다
자신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에게 우리의 감정을 바라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실패보다 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9.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환난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

로마서 5장은 놀라운 역설을 말합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로마서 5:3)

 

세상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환난이 있는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환난은 인내를 만들고, 인내는 연단을 만들고, 연단은 소망을 만듭니다. 

 

여기서 바울은 고난 자체를 미화하지 않습니다. 

고난은 여전히 아픕니다. 눈물이 납니다. 상실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을 헛되게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마치 요셉의 삶과 같습니다. 형들의 미움은 하나님의 섭리를 막지 못했습니다.

감옥도 하나님의 계획을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 모든 과정을 사용하여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셨습니다.

요셉은 마침내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창세기 50:20)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은 십자가로 예수를 죽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우연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선을 이루는 도구가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

 

그래서 믿음은 현실을 부정하는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는 소망입니다.

10.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이미 확증되었다

많은 성도들이 묻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까요?"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현재의 환경에서 찾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찾으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5:8은 복음의 심장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바울은 "우리가 회개한 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거룩해진 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헌신한 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사도 요한도 같은 진리를 선포합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한일서 4:19)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영원한 증명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감정에 기초하지 않습니다.

환경에 기초하지 않습니다. 성공과 실패에도 기초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변하지 않는 역사적 사건 위에 서 있습니다.

존 스토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죄인을 향하여 하실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사랑의 선언이다."

 

로마서 5장은 우리에게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선포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더 이상 두려움 속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화평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더 이상 죄책감에 묶인 사람이 아니라 은혜 안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더 이상 미래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영광의 소망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데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죄책감은 감사로 바뀌고, 부끄러움은 담대함으로 바뀌며, 두려움은 평안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가 오늘도 누리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11. 복음은 한 사람 때문에 망한 인류를, 또 한 사람 때문에 살리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한 사람 아담으로 죽음이 왔고,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생명이 왔다)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로마서 5:19)

 

로마서 5장의 후반부는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바울은 인류의 역사를 두 사람으로 설명합니다.

첫 번째 사람은 아담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이 이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에게 속해 있다고 말합니다.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죄와 사망 아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의와 생명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로마서 5:12)

 

오늘날 사람들은 죄를 단지 개인의 실수나 윤리적 결함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죄를 훨씬 더 깊은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존재 상태입니다.

 

죄는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는 반역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은 선악과 하나를 먹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거짓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죄가 인간의 본성이 되었고,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이것이 원죄의 교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이 스스로 살아날 수 없듯이, 영적으로 죽은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12.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으로 오셨습니다

바울은 아담을 설명한 후 곧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오직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로마서 5:15)

 

한 사람의 범죄가 모든 사람에게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은 모든 믿는 자에게 생명을 가져왔습니다.

고린도전서 15:22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를 도우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실패를 조금 보완해 주시는 분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인류의 대표로 오셨습니다. 

 

아담이 실패한 순종을 예수님은 완전하게 이루셨습니다.

첫 번째 아담은 동산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습니다.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태복음 26:39)

 

첫 번째 아담은 나무 앞에서 넘어졌습니다. 마지막 아담은 십자가라는 나무 위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첫 번째 아담은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마지막 아담은 영원한 생명을 가져오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13. 은혜는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참된 은혜는 반드시 삶을 변화시킵니다. 칭의는 성화의 출발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신 사람은 성령 안에서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계속 전개하면서 로마서 6장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로마서 6:1-2)

 

은혜는 죄를 허용하는 면허증이 아닙니다. 은혜는 죄를 이길 능력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새로운 소원을 주십니다.

 

기도가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 됩니다. 예배가 형식이 아니라 감격이 됩니다. 헌신이 부담이 아니라 감사가 됩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결론 : 우리는 모두 영적인 바라바입니다

이번 말씀을 마무리하며 다시 바라바를 생각해 봅시다.

바라바는 이유도 모른 채 감옥에서 풀려났습니다.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를 예수님께서 대신 지셨기 때문입니다.

바라바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받을 자격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사실 바라바는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우리는 심판받아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자리를 대신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얼떨결에" 은혜를 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에서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창세 전부터 계획하신 구원의 섭리였습니다.

에베소서 1:4-7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내가 하나님을 붙잡은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끝까지 나를 붙드신 이야기'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여 살아갑니다.

오늘도 우리는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갑니다.

오늘도 우리는 자신의 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평생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고린도전서 15:1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은 더 열심히 살아야 하나님께 사랑받는다는 소식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오늘도 그 은혜를 붙드십시오. 그 은혜 안에 거하십시오. 그리고 그 은혜를 세상에 흘려보내는 복음의 통로가 되십시오.

 

마침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 우리의 모든 공로를 내려놓고 오직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만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요한계시록 5:12)

영성 깊은 기도문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행위로 하나님께 나아가려 했던 우리의 교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공로를 쌓아 하나님께 인정받으려 했지만,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의가 더러운 옷과 같음을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아브라함처럼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환난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신뢰하는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두려움과 정죄와 죄책감을 성령께서 십자가의 은혜로 녹여 주시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자답게 평안과 담대함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값없이 받은 은혜를 값없이 흘려보내는 삶을 살게 하시고,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일터가 복음의 향기로 가득하게 하옵소서.

마지막 날까지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셔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마지막 아담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제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을 안내해드립니다. 더 편하고 유익하게 콘텐츠를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https://www.youtube.com/@%EC%97%A0%EB%A7%88%EC%98%A4%EC%A7%80%EC%8B%9D%EB%B0%9C%EC%A0%84%EC%86%8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