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 4강]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knowledgeplatform100 2026. 7. 1. 09:28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율법은 죄를 드러내는 엑스레이지만 은혜만이 생명을 주는 치료제입니다

율법을 붙잡는 사람인가, 은혜를 누리는 사람인가 (로마서 7:1-25, 8:1-4)

 

들어가는 말

우리 안에는 한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나'가 살아 있습니다.

기도하고 싶은 나와 기도하기 싫은 나. 용서하고 싶은 나와 끝까지 미워하고 싶은 나. 믿고 싶은 나와 의심하는 나.

예배하고 싶은 나와 세상을 붙잡는 나. 사도 바울 역시 동일한 고백을 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로마서 7:19)

 

이 말씀은 단순히 인간의 의지력이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죄의 본성과 은혜의 능력 사이에서 살아가는 모든 성도의 현실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7장, 8장을 통해 왜 우리 안에 이렇게 많은 '나'가 존재하는지,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는지 보겠습니다. 

결론은 율법은 나를 바꾸지 못하지만 성령은 나를 새롭게 하신다.

1. 복음은 '착하게 사는 방법'이 아니라 '새 생명을 얻는 사건'이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윤리로 이해합니다.

예수 믿으면 착해지는 것. 예수 믿으면 성실해지는 것. 예수 믿으면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것. 

그러나 바울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로마서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 하셨다." 입니다.

로마서 1:16은 선언합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복음은 인간이 하나님께 올라가는 사다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려오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언제나 은혜입니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죄인을 용서하시는 것. 의를 입혀 주시는 것. 성령을 주시는 것. 생명을 주시는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모든 선물의 총체입니다.

믿음은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손입니다. 은혜는 하나님 편이고, 믿음은 인간 편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통해 은혜를 받을 때 비로소 복음이 실제가 됩니다.

2. 율법은 죽은 남편이고 예수님은 새 남편이시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매우 놀라운 비유를 사용합니다. 결혼 이야기입니다.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새로운 남편과 결혼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율법은 옛 남편입니다. 예수님은 새 남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율법을 잘 지켜야 하나님께 인정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르게 말합니다.

율법은 지켜서 구원받는 대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할 대상입니다.

갈라디아서 2: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죽은 남편에게 다시 돌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계속 옛 남편에게 돌아갑니다.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되지?" "나는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할 거야." "나는 부족해." "나는 실패했어." 

 

이것이 모두 율법의 언어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언어는 다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의롭다 하였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것이 새 남편의 음성입니다.

3. 옛 남편의 상처는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만든다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통찰은 이것입니다.

옛 남편은 죽었습니다. 그런데 기억은 살아 있습니다. 이것이 죄책감입니다. 이것이 영적 트라우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용서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스스로를 정죄합니다.

이미 자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죄인의 신분으로 살아갑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계속 종처럼 살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율법 아래 오래 살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폭력적인 남편에게 오랫동안 학대받던 사람이 좋은 남편을 만나도 사랑을 믿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시는데 나는 의심합니다. 예수님은 용서하시는데 나는 나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품으시는데 나는 계속 도망갑니다. 이것이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으라." 죽어야 자유가 옵니다.

 

4. 율법은 죄를 드러내는 엑스레이지만 은혜만이 생명을 주는 치료제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 7절에서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바울은 율법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거룩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율법이 아니라 죄된 인간의 본성입니다. 율법은 죄를 치료하는 약이 아니라 죄를 진단하는 엑스레이입니다.

 

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으면 병이 보입니다. 그러나 엑스레이가 병을 고쳐 주지는 않습니다. 병의 심각성을 보여 줄 뿐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합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달음이라." (로마서 3:20)

 

그래서 루터는 율법을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개혁주의 신학은 율법의 첫 번째 기능을 "죄를 드러내는 거울"이라고 말합니다.

 

거울은 얼굴의 더러움을 보여 주지만 씻어 주지는 못합니다.

복음만이 씻습니다. 은혜만이 살립니다. 십자가만이 의롭게 합니다. 성령만이 변화시킵니다.

 

오늘날도 많은 성도들이 율법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려 합니다.

"더 열심히 기도해야지." "더 금식해야지." "더 봉사해야지." "더 완벽해야지."

 

물론 경건훈련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한 조건이 되는 순간, 복음은 사라지고 율법주의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먼저 보시는 분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먼저 보시는 분입니다.

에베소서 1장 6절은 "그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열심 때문에 사랑받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받기 때문에 열심을 내는 존재입니다.

5. "내가"가 너무 많으면 은혜는 사라진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의 특징은 끊임없이 "내가"라는 단어가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행하고" "내가 실패하고" "내가 잘했고" "내가 못했고" "내가..."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죄는 단순히 나쁜 행동이 아니라 자기 중심성(curvatus in se, 자기 자신 안으로 굽어진 인간)입니다. Martin Luther는 인간이 죄 가운데 있을 때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을 향해 휘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반대로 은혜의 사람은 중심이 바뀝니다.

"주님이 하셨습니다."

"주님이 공급하셨습니다."

"주님이 용서하셨습니다."

"주님이 인도하셨습니다."

복음은 '나를 크게 만드는 종교'가 아니라 '예수님을 크게 보는 신앙'입니다.

 

세례를 베풀던 John the Baptist의 고백이 이를 잘 보여 줍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한복음 3:30)

 

은혜는 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나의 왕좌에서 나를 내려오게 합니다.

6. 좋은 것도 율법주의가 되면 우상이 된다

사탄은 악한 것만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좋은 것을 왜곡하여 사람을 넘어뜨립니다.

믿음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도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헌신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 읽기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금식했습니다. 십일조도 했습니다. 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책망하셨습니다. 왜입니까?

모든 종교행위의 중심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의였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기도 전체에 "나는"만 있습니다. 반면 세리는 가슴을 치며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예수님은 세리가 의롭다 함을 받고 돌아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은혜는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고, 율법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것이 둘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7. 욥의 친구들은 왜 위로자가 아니라 재난이 되었는가

Job의 친구들은 처음에는 훌륭했습니다. 그들은 칠 일 동안 아무 말 없이 함께 울었습니다.

그 침묵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입을 열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들의 신학은 단순했습니다. "고난이 왔으니 반드시 죄가 있다." 이것은 철저한 율법적 사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은 달랐습니다. 욥의 고난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더 깊은 섭리 안에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쉽게 욥의 친구가 됩니다. 상처 입은 사람에게 말씀을 던집니다.

실패한 사람에게 정죄를 던집니다. 넘어진 사람에게 충고를 던집니다. 그러나 복음은 먼저 설명보다 공감을 선택합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만나시면 먼저 품으셨고, 그 후에 변화시키셨습니다.

교회 역시 율법을 들이대는 공동체가 아니라 은혜를 흘려보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정죄가 아니라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8.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 바울의 절망은 실패가 아니라 은혜의 시작이다

이제 우리는 로마서 7장의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바울은 자신의 영적 상태를 이렇게 탄식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24)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패배한 신앙인의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이 고백은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죄인은 자신의 죄를 슬퍼하지 않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교만을 모릅니다.

죽은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임하시면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을 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괜찮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아직 부족하지만 노력하면 된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철저히 자신의 무능을 인정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출발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자신 안에 하나님 앞에 내세울 의가 전혀 없음을 인정하는 상태입니다.

이 사람이 은혜를 붙듭니다. 반대로 자기 의가 살아 있는 사람은 끝까지 은혜를 붙잡지 못합니다.

9. 내 속에는 두 사람이 아니라 두 법이 싸우고 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반복해서 말합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그러나 또 다른 법이 자신 안에서 싸우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이 말하는 싸움은 단순한 성격의 갈등이 아닙니다. 이것은 죄의 법과 생명의 성령의 법 사이의 전쟁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을 설명하면서 "사랑의 방향이 바뀐 존재"라고 했습니다.

죄인은 자신을 사랑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성화의 과정 속에서는 두 방향이 계속 충돌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기도하려는 마음과 쉬고 싶은 마음이 싸웁니다. 용서하려는 마음과 복수하려는 마음이 싸웁니다.

섬기려는 마음과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싸웁니다. 이 싸움 자체가 구원의 증거입니다. 

 

죽은 사람은 싸우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만 싸웁니다. 성령께서 살아 계시기에 우리는 죄와 싸우는 것입니다.

10.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감성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신학적으로 보면 이것은 옛사람과 새사람의 긴장을 말합니다.

에베소서 4장은 말합니다.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

 

옛사람은 이미 십자가에서 심판받았습니다. 그러나 습관은 남아 있습니다.

죄의 기억은 남아 있습니다. 상처도 남아 있습니다. 두려움도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주 과거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과거의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피조물로 부르십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고린도후서 5:17)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보다 우리의 미래를 보십니다. 죄보다 십자가를 보십니다.

실패보다 그리스도를 보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11. 절망은 7장에서 끝나고 승리는 8장에서 시작된다

바울은 7장에서 탄식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곧바로 로마서 8장으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성경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언 가운데 하나를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8:1)

 

'결코'라는 말은 헬라어 원문에서도 매우 강한 부정입니다.

조금도 없습니다. 다시는 없습니다. 영원히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모두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는 이미 끝났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성도를 심판의 대상으로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보십니다. 이것이 칭의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정죄에서 자유를 얻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이미 자유를 얻은 사람이 자유답게 살아가는 여정입니다.

12. 율법은 브레이크, 성령은 가속페달

앞서 살펴 본 것처럼 율법은 브레이크와 같습니다. 멈추게 합니다. 죄를 깨닫게 합니다.

 

그러나 달리게 하지는 못합니다. 반면 성령은 생명의 능력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믿음을 일으키십니다.

사랑하게 하십니다. 순종하게 하십니다.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화는 인간의 의지력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은 이를 성령의 열매라고 부릅니다.

열매는 억지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맺힙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충만하시면 용서가 열매가 됩니다. 겸손이 열매가 됩니다. 감사가 열매가 됩니다.

사랑이 열매가 됩니다.

13.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바울은 마침내 우리 시선을 현재에서 영원으로 옮깁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로마서 8:18)

 

복음은 고난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난보다 큰 영광이 있다고 말합니다.

십자가 뒤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눈물 뒤에는 위로가 있습니다. 죽음 뒤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성도는 현실을 부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현실 너머의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은 현재의 고난에 매몰되지 않습니다.

맺는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는 여전히 많은 '나'가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나, 교만한 나, 상처 입은 나, 욕심 많은 나, 죄책감에 묶인 나. 그러나 그보다 더 크신 분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옛 남편인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지만, 새 남편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지만, 은혜는 생명을 줍니다. 

 

율법은 브레이크를 밟게 하지만,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를 향해 달리게 하십니다.

오늘도 우리의 시선을 '나'에게서 '그리스도'께로 옮기십시오.

 

그러면 우리 안의 수많은 '나'는 점점 작아지고, 그리스도는 점점 커지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바울의 마지막 고백을 우리의 고백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로마서 7:25)

영성 깊은 기도문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너무도 많은 '나'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보다 앞서려는 나, 사람의 인정을 구하는 나, 두려움과 죄책감에 사로잡힌 나를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습니다.

 

주님, 율법의 정죄 아래 살지 않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하옵소서. 옛사람의 습관과 상처에 붙들리지 않게 하시고, 성령께서 날마다 새사람을 살아내도록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려 주옵소서.

 

우리의 눈을 현재의 고난이 아니라 장차 나타날 영광으로 향하게 하시고,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소망으로 오늘을 인내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이 정죄가 아닌 용서를, 교만이 아닌 겸손을, 미움이 아닌 사랑을, 절망이 아닌 소망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믿음의 길을 끝까지 달려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시며 새 남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제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을 안내해드립니다. 더 편하고 유익하게 콘텐츠를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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