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칼럼] 복음 들여다보기

[영성 칼럼] 그리스도인의 네 가지 성품(에베소서 4장 1–6절)

knowledgeplatform100 2026. 9. 22. 10:50

그리스도인의 성품 네 가지 (에베소서 4장)

하나 됨을 지키는 그리스도인의 영성

오늘 본문은 에베소서 4장 1절부터 8절입니다. 에베소서는 6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구조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부터 3장까지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행하셨는가를 말씀합니다.

 

그리고 4장부터 6장까지는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씀합니다.

그래서 4장 1절은 아주 중요한 단어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갑자기 삶의 윤리를 들이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한 복음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착하게 살아라”가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먼저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언제나 “그러므로”가 있어야 합니다.

“왜 이렇게 삽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용서합니까?” “내가 먼저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왜 사랑합니까?” “그리스도께서 먼저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섬깁니까?” “그리스도께서 먼저 나를 섬기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적 삶입니다.

 

에베소서 4장 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르심”과 “행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라고 말씀합니다.

신앙과 삶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는 신앙인인데 세상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복음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배와 직장이 다르고, 기도와 인간관계가 다르고, 성경과 실제 삶이 따로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믿음이 삶을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네 가지 성품은 바로 그 믿음이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줍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 에베소서 4:2–3

 

여기에 네 가지 성품이 등장합니다.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함. 그리고 그 목적은 하나입니다.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의 성품의 출발은 겸손입니다

첫 번째는 겸손입니다. 우리는 보통 겸손이라고 하면 자신을 낮추는 것을 생각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적 겸손은 자기비하와 다릅니다. 복음적 겸손은 나 자신에게만 시선을 집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다른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그리고 2장 5절부터는 결정적인 모델을 제시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본래 하나님의 본체이셨지만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정한 겸손을 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미워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 존재를 부정하신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영광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적 겸손은 자기혐오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이웃을 살리는 자기초월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하나 되게 합니다. 왜 교회가 갈라집니까? 대부분의 갈등에는 “나”가 중심에 들어옵니다.

“내 생각이 맞습니다.”

“내가 옳습니다.”

“내가 더 많이 했습니다.”

“왜 나를 인정하지 않습니까?”

“왜 내 의견을 받아주지 않습니까?” 그 순간 공동체의 중심이 그리스도에게서 나에게로 이동합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묻습니다. “내가 옳으냐?”보다 “그리스도가 높아지고 있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교회가 정말 건강해지려면 사람들이 서로를 이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세워주어야 합니다.

 

바울이 말한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은 단순한 개인의 도덕적 미덕이 아니라 공동체의 하나 됨을 지키는 방식입니다.

실제로 에베소서 4장에 대한 주석들은 겸손이 다른 성도를 자신보다 열등하게 여기지 않는 태도이며, 그 목적이 성령 안에서 이미 주어진 공동체의 하나 됨을 보존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나를 높이고 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높이고 있는가?”

찬송도 그래서 중요합니다.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교만은 모든 영광을 자기에게 돌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주님이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내가 아니라 주님입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내가 나를 낮추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면 자연스럽게 내가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진정한 겸손은 자기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것입니다.

 

2. 하나 됨을 지키는 두 번째 성품은 온유입니다

두 번째는 온유입니다. 에베소서 4장 2절의 “온유”는 약함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온유는 오히려 힘이 있으나 그 힘을 자기중심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 마태복음 11:29

 

예수님은 약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풍랑을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그 권세를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 앞에서도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온유는 힘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힘을 하나님께 맡기는 상태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신의 권리를 무조건 앞세우지 않습니다.

“내가 왜 손해 봐야 합니까?”

“내가 왜 양보해야 합니까?”

“내가 왜 먼저 사과해야 합니까?”

 

이런 질문만 붙들고 있으면 공동체는 계속 싸우게 됩니다. 물론 이것이 모든 부당함을 방치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은 불의와 죄를 침묵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도 복음을 위해 담대하게 항변했습니다.

그러므로 온유는 불의에 대한 무조건적 침묵이 아닙니다.

 

온유는 자신의 힘과 권리를 하나님께 맡기면서도 진리를 사랑하는 태도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민수기 12장 3절은 모세에 대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그런데 모세는 지도자였습니다.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판했습니다.

그때 모세가 자신의 권리를 가지고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일을 다루십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 권리를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온유는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책임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백성의 죄를 자기 문제처럼 품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서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모세는 자신을 위한 새로운 민족을 만들어 주겠다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도 백성을 위해 중보합니다. 이것이 지도자의 온유입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겠다”가 아니라 “이 사람들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그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도 이런 온유가 필요합니다. 가정에도 필요합니다. 직장에도 필요합니다. 부부 사이에도 필요합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필요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갈등을 없애는 사람이 아니라 갈등 속에서도 자기중심성을 내려놓는 사람입니다.

 

3. 세 번째 성품은 오래 참음입니다

세 번째는 오래 참음입니다.

사실 이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좋은데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나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투가 마음에 안 듭니다. 행동이 마음에 안 듭니다. 속도가 마음에 안 듭니다. 생각이 다릅니다. 나와 너무 다릅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4장 2절은 말합니다.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오래 참음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사랑입니다.

 

어떤 신학적·목회적 해석에서도 이 점이 중요하게 강조됩니다.

에베소서 4:1–2에서 오래 참음은 단순히 시간을 잘 견디는 인내가 아니라 실제 사람들의 차이와 약점을 사랑으로 감당하는 태도로 제시됩니다. 우리는 사랑을 말할 때 아름다운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의 첫 번째 특징을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래 참으셨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한 번의 실수로 버리셨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연약함을 보실 때마다 즉시 심판하셨다면 나는 이미 끝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다리셨습니다. 깨닫기를 기다리셨습니다. 돌아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성숙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우리 안에 흘러 들어와야 합니다. 그래서 오래 참음은 성품의 근육과 같습니다.

운동을 한 번 했다고 근육이 생기지 않습니다. 조금씩 반복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인내도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 자랍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이 나에게 하나님의 훈련장이 될 수 있습니다.

 

“왜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이렇게 힘들어?” 이렇게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지금 내 안에 무엇을 훈련하고 계시는가?”

라고 질문해 보십시오. 그러면 사람이 시험지가 됩니다.

 

불편한 사람이 나의 인내를 훈련시키는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잘못된 행동을 무조건 허용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폭력과 학대와 명백한 죄를 무조건 참고 있으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성경적 오래 참음은 죄와 악을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사람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렇게 대하셨기 때문입니다.

 

4. 네 번째 성품은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이제 네 번째입니다.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이것이 오늘 말씀의 깊은 절정입니다.

 

용납한다는 것은 단순히 “저 사람 싫지만 참아주자.” 라는 의미가 아니라 성경적 용납은 사랑으로 서로의 연약함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5장 7절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먼저 받아들여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내가 용서받았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은혜를 베풀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죄를 “나와 내 아버지 집이 범죄하였다”고 고백하며 공동체의 문제를 자기 문제처럼 짊어진 장면을 연결합니다. 이 부분은 ‘용납은 타인의 문제를 내 책임의 영역 안으로 품는 것’​이라는 핵심 통찰로 살릴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성경 본문의 언어를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절의 “bearing with one another”는 서로의 약함을 견디고 감당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단순히 “상대방의 잘못을 내가 임신한다”는 식으로 어원적 의미라고 단정하는 것보다는,

상대의 연약함을 사랑으로 품고 감당한다는 목회적 이미지로 이해하는 것이 더 안전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느헤미야의 기도는 아주 중요한 사례입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구하옵나니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 집이 범죄하여”

 

놀라운 기도입니다. “그들이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와 내 아버지 집이 범죄했습니다.”

공동체의 실패를 자기 밖의 문제로 밀어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중보자의 마음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은 교회의 문제를 보면서 “저 사람들이 문제야.” 라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고쳐 주십시오.” 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용납입니다. 

 

5. 네 가지 성품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 하나됨입니다

이제 네 가지를 연결해 보십시오. 

겸손. 나는 중심이 아닙니다.

온유. 내 권리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오래 참음. 사람을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용납. 사랑으로 서로의 연약함을 감당합니다.

 

이 네 가지가 모이면 무엇이 됩니까? 하나 됨입니다. 바울은 3절에서 말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여기서 아주 중요한 신학적 원리가 있습니다.

바울은 “너희가 하나가 되라.” 고 말하기 전에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라.” 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의 하나 됨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작품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선물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아니라 보존하고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둘을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4장에서는 “그 하나 됨에 합당하게 살아라.” 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에베소서 4장 1절의 “그러므로”가 앞선 1–3장의 구원과 화해에 대한 논의를 4장 이후의 공동체적 삶으로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 사람”이 된 것이 4장의 “하나”라는 반복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교회의 하나 됨은 획일성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격도 다릅니다.

은사도 다릅니다.

경험도 다릅니다.

직분도 다릅니다.

문화적 배경도 다릅니다. 그런데도 하나입니다. 왜입니까?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6. 에베소서 4장 7절의 은혜, "하나이지만 다양합니다 "

여기서 7절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보십시오. 4절부터 6절까지는 계속 “하나”를 말합니다.

한 몸. 한 성령. 한 소망. 한 주. 한 믿음. 한 세례. 한 하나님 아버지. 그런데 7절에서는 갑자기 “각 사람에게” 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신비입니다. 하나는 획일성이 아니고, 다양성 속의 하나 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은사는 자기 자랑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몸 전체를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몸에는 눈도 있고 귀도 있고 손도 있고 발도 있습니다.

눈이 귀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귀가 발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기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비교가 시작되면 하나 됨이 깨집니다. “왜 저 사람에게는 저 은사가 있고 나에게는 없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

내게 주어진 은혜가 있습니다.

내가 감당할 사명이 있습니다.

내가 섬길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담당해야 할 영역이 있습니다.

탁월함은 남보다 많은 것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것을 충실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7. 그러므로 탁월함은 능력보다 성품입니다

오늘 제목이 “탁월함에 이르는 성품 네 가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은 탁월함을 능력으로 설명합니다.

얼마나 많이 아느냐.

얼마나 빨리 일하느냐.

얼마나 큰 성과를 내느냐.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올라가느냐.

 

그러나 성경은 탁월함을 다른 방식으로 봅니다. 하나님께 받은 능력을 어떤 성품으로 사용하는가?

능력이 있는데 교만하면 공동체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권한이 있는데 온유하지 않으면 사람을 상하게 할 수 있습니다.

지식이 있는데 오래 참지 못하면 사람을 정죄할 수 있습니다.

옳은 말을 하는데 사랑이 없으면 사람을 살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탁월함은 능력 × 성품 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능력이 아무리 커도 성품이 무너지면 그 능력이 공동체를 세우지 못합니다.

반대로 작은 능력이라도 성령 안에서 겸손하고 온유하고 오래 참고 사랑으로 품으면 사람을 살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 가장 큰 자냐?” 라는 질문 앞에서 어린아이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섬김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위대함은 왕좌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사람을 누르는 능력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었습니다.

 

8.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이제 오늘 말씀의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에베소서 4장 3절입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여기서 “힘써”라는 표현을 놓치지 마십시오.

하나 됨은 선물이지만, 그 선물을 지키는 데는 우리의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 됨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러나 분열은 우리의 죄를 통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끊임없이 하나 됨을 지켜야 합니다.

실제로 에베소서 4장에 대한 주석은 이 긴장이 중요하다고 설명합니다. 공동체의 하나 됨은 이미 주어진 현실이면서 동시에 성도들이 계속해서 성숙해 가며 돌보고 지켜야 할 부르심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지킵니까? 바울은 네 가지를 말합니다.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사랑 가운데 용납함. 결국 하나 됨은 회의 기술로만 유지되지 않습니다.

조직 구조로만 유지되지 않습니다. 규칙으로만 유지되지 않습니다. 하나 됨은 성품으로 유지됩니다.

 

9. 교회는 기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중요한 통찰은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그리고 교회 역시 기계처럼 부품을 교체하면 되는 조직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몸이라는 것입니다. 이 이미지는 에베소서 4장 후반부의 “몸”이라는 교회론과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계는 고장난 부품을 교체하면 됩니다. 그러나 몸은 그렇지 않습니다. 몸의 한 부분이 아프면 다른 부분도 영향을 받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이 아프면 공동체가 아픕니다.

한 사람이 회복되면 공동체가 기뻐합니다.

한 사람이 넘어지면 공동체가 함께 붙들어야 합니다.

한 사람이 성장하면 공동체 전체가 유익을 얻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릅니다.

몸에는 다양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가?” 만이 아닙니다. 

“내가 몸 전체를 살리고 있는가?” 입니다. 이것이 성경적 성숙입니다.

 

10. 오늘 우리의 삶에 네 가지를 적용합시다

이제 아주 실제적으로 적용해 보겠습니다.

 

첫째, 겸손을 실천하십시오.

오늘 한 사람을 높여주십시오. 칭찬하십시오. 감사하십시오. 인정하십시오.

내가 평소에 잘 인정하지 않는 사람을 한 번 높여 보십시오. 그 순간 내 안의 교만이 무너지고 공동체의 관계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둘째, 온유를 실천하십시오.

내 권리를 주장하기 전에 한 번 멈추십시오.

“내가 이것을 반드시 얻어야 하는가?”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가?”

“이 문제에서 내가 책임져야 할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셋째, 오래 참으십시오.

오늘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한 번 더 품으십시오.

한 번 더 기다리십시오.

한 번 더 기도하십시오.

한 번 더 말하기 전에 침묵하십시오. 그 한 번이 성품을 만듭니다.

 

넷째, 용납하십시오.

상대의 약점을 발견했을 때 즉시 정죄하지 마십시오. “왜 저 사람은 저럴까?”

에서 끝내지 말고 “하나님, 저 사람을 위해 제가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라고 물으십시오.

이것이 중보자의 마음입니다.

 

11. 결국 네 가지 성품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여러분, 이 네 가지를 우리가 의지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어렵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성화는 단순한 자기계발이 아닙니다.

 

“나는 내일부터 겸손해야지.”

“나는 이제 온유해야지.”

“나는 화를 안 내야지.”

이것만으로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성품은 마음의 뿌리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 4장 23–24절에서 “심령이 새롭게 되어 새 사람을 입으라” 고 말씀합니다.

변화의 출발은 자기개선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바꾸셔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 안에 형성되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은 성령의 열매를 말씀합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보십시오. 오늘 본문의 성품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탁월한 성품은 인간적 수양의 결과만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입니다.

 

12. 결론 — 그리스도의 성품을 품은 사람은 사람을 살리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것입니다.

“탁월함은 나를 높이는 능력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살리는 성품에서 드러납니다.”

 

겸손은 나를 높이지 않고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높이는 것입니다.

온유는 내 힘과 권리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오래 참음은 사람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용납은 사랑으로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네 가지가 모여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는 공동체를 만듭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목소리가 아닐 수 있습니다.

더 강한 주장도 아닐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지식도 아닐 수 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조금 더 겸손한 마음,
조금 더 온유한 마음,
조금 더 오래 참는 마음,
조금 더 품어주는 마음
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논쟁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장 4절부터 6절을 다시 기억하십시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하나입니다. 한 몸. 한 성령. 한 소망. 한 주. 한 믿음. 한 세례. 한 하나님. 우리가 하나인 이유는 우리가 서로 똑같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한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이렇게 살아가십시오.

갈등이 생길 때, “내가 이길 것인가?”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드러날 것인가?” 를 물으십시오.

누군가 나를 힘들게 할 때, “저 사람을 어떻게 밀어낼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관계를 통해 내게 무엇을 가르치시는가?” 를 물으십시오. 

내 권리를 주장하고 싶을 때, “내 권리보다 내가 감당해야 할 책임은 무엇인가?” 를 물으십시오.

누군가의 약점이 보일 때, “어떻게 정죄할까?”가 아니라 “어떻게 품고 기도할까?” 를 물으십시오.

 

그때 우리의 신앙은 “그러나”의 신앙이 아니라 “그러므로”의 신앙​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으므로, 나도 이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용서하셨으므로, 나도 용서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품으셨으므로, 나도 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오래 참으셨으므로, 나도 오래 참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셨으므로, 나도 낮아져 섬깁니다.

이것이 바로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탁월한 그리스도인의 성품입니다.

 

마치는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 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삶이 그 은혜에 합당하게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우리에게 겸손을 주옵소서.

 

나를 드러내려는 마음보다 주님을 높이게 하시고,

나의 공로를 주장하기보다 다른 사람을 세워주게 하시며,

나의 이름보다 예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을 기뻐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에게 온유를 주옵소서.

우리의 힘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권리를 앞세우기보다 하나님께 맡기게 하시며,

진리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사랑으로 말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에게 오래 참음을 주옵소서.

사람을 쉽게 포기하지 않게 하시고,

상처를 받았을 때 즉시 갚으려 하지 않게 하시며,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통해서도 나의 성품을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에게 용납하는 사랑을 주옵소서.

다른 사람의 약점과 실패를 정죄하기보다 품게 하시고,

느헤미야처럼 공동체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게 하시며,

“저 사람의 문제”라고 말하기 전에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부어 주옵소서.

우리의 힘으로 성품을 만들어내려 하지 않게 하시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주님께 내어드리게 하옵소서.

 

성령님,

우리의 교만을 낮추시고,

우리의 거친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우리의 조급함을 오래 참음으로 바꾸시고, 우리의 정죄를 사랑으로 바꾸어 주옵소서.

우리 가정이 하나 되게 하시고,

우리 교회가 하나 되게 하시고,

우리의 일터와 공동체가 하나 되게 하옵소서.

 

그러나 그 하나 됨이 단순한 인간적 단결이 되지 않게 하시고,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 됨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서로 똑같아서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르지만 한 주님을 바라보기 때문에 하나 되게 하옵소서.

한 몸,

한 성령,

한 소망,

한 주,

한 믿음,

한 세례,

한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의 삶을 통해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런 분이시구나” 라고 볼 수 있게 하옵소서.

우리의 말보다 우리의 성품으로 복음을 증거하게 하시고, 우리의 능력보다 우리의 사랑으로 예수님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로 하여금 사람을 이기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갈등을 키우는 사람이 아니라 화해를 만드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상처를 주는 사람이 아니라 상처 입은 사람을 품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나를 높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만 높이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삶이 “그러므로”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셨으므로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먼저 용서하셨으므로 용서하고,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품으셨으므로 우리도 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낮추셨으므로 우리도 기꺼이 낮아져 섬기게 하옵소서.

 

오늘도 우리 안에서 시작하셔서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공동체로 흘러가는 그리스도의 하나 됨을 이루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